사건: 85노90호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 피고인: 유시민 위 사건에 관하여 피고인은 다음과 같이 항소이유서를 제출합니다.
본 피고인이 1심 법정에서 징역 1년 6월의 형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 항소한 것은 결코 본 피고인의 행위가 무죄라거나 그 선고된 형량이 무겁기 때문이 아닙니다. 본 피고인은 현행 실정법상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을 위반했다는 혐의를 쓰고 있으나, 본 피고인이 진실로 법을 위반했는가 안 했는가 하는 문제는 본 피고인의 양심의 법정에서 이미 가려진 바 있으며, 또한 역사의 심판대 위에서 종국적으로 판가름 날 것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세속의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하여 자신을 변명하고자 하는 구차한 노력을 기울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1심의 재판 과정에서 재판부가 본 피고인을 포함한 학생 피고인들에게 내린 판결은 사건의 진상을 외면한 채 수사기관의 왜곡된 조작에 기초하여 내려진 불공정한 판결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본 피고인의 행위가 지니는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전적으로 무시한 채 오직 지배권력의 안보만을 위해 내려진 정치적 판결이었기에, 본 피고인은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이 사건의 진실을 밝혀 역사와 국민의 심판대 앞에 고발하고자 항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옛소련의 시인 네크라소프의 이 한 구절은 본 피고인이 비록 미숙하고 거칠기는 하지만 온몸으로 살아오면서 늘 가슴속 깊이 간직해 온 좌우명이었습니다. 본 피고인은 비록 1심 법정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차디찬 감옥에 갇혀 있는 몸이지만, 내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본 피고인이 행한 모든 행위는 오직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른바 '서울대 학원 프락치 사건'으로 명명된 이 사건은 본 피고인을 비롯한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학원에 침투하여 학생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민주화 운동을 파괴하려 했던 수사기관의 정보원(프락치)들을 적발하여 그 배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현 정권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고 권력을 찬탈한 이래, 그 정당성의 결여를 메우기 위해 온갖 기만적인 수단과 폭력을 동원하여 국민들을 억압해 왔습니다. 특히 미래의 주역인 대학생들의 순수한 민주화 요구를 폭력으로 짓밟고, 급기야는 신성한 학원 내에까지 수사기관의 하수인들을 침투시켜 학생들을 감시하고 모함하는 반인륜적이고 파렴치한 공작을 자행해 왔습니다.
본 피고인을 포함한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학원의 자율성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학내에 잠입한 프락치들을 적발했던 것이며, 이 과정에서 그들이 자백을 기피함에 따라 다소간의 물리적 충돌과 폭행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민간인을 이유 없이 감금하고 폭행하려 했던 의도적인 범죄가 아니라, 부도덕한 정권의 학원 파괴 공작에 맞서 학원을 방어하기 위해 발생한 정당방위적 성격의 행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과 1심 재판부는 사건의 본질인 '독재정권의 학원 프락치 공작'이라는 거대한 악은 철저히 은폐한 채, 오직 학생들이 행한 폭력 행위만을 부각시켜 본 피고인을 흉악한 폭력배로 몰아세웠습니다.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며, 거대한 도둑을 잡기 위해 몽둥이를 든 사람을 도둑으로 처벌하는 것과 다름없는 가혹하고 불공평한 처사입니다.
법은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할 때 비로소 그 권위와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의 법은 오직 소수의 독재 권력을 유지하고 그들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한 억압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정당성이 없는 권력이 휘두르는 법률적 강제는 폭력에 다름 아닙니다. 1980년의 군사 쿠데타와 광주 학살을 통해 집권한 현 정권은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전혀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정권입니다. 그들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해 언론을 통제하고, 양심적인 종교인, 노동자, 학생들을 감옥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식을 배우고 진리를 탐구하는 대학생들이 침묵하는 것은 역사와 조국에 대한 직무유기이며, 부도덕한 권력의 하수인이 되는 길입니다.
본 피고인은 대학에 입학한 이래 줄곧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늘과 고통받는 민중들의 삶을 목격해 왔습니다. 농민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는 현실, 노동자들의 인간 이하의 삶과 정당한 권리조차 박탈당한 현실을 보며 본 피고인은 깊은 고뇌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모순의 근원이 바로 군사독재 정권의 일인 독재 체제와 부조리한 사회 구조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본 피고인이 행한 학생운동과 민주화 운동은 단순한 혈기나 선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진정한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의 표현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고 존엄한 존재로 태어났으며,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언제나 민주주의와 정의를 향해 발전해 왔습니다. 지금 비록 독재 권력의 서슬 퍼런 칼날이 우리의 목을 겨누고 있고, 본 피고인이 이 차디찬 독방에서 청춘의 시간을 빼앗기고 있을지라도, 본 피고인은 결코 절망하거나 후회하지 않습니다.
법은 자기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지만 양심은 그렇지 못합니다. 법은 일시적 상대적인 것이지만 양심은 절대적이고 영원합니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양심은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 피고인은 양심을 따랐습니다.
재판부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비록 독재 정권의 하수인으로서 본 피고인에게 유죄의 판결을 내릴 수 있을지 모르나, 머지않은 장래에 역사와 국민의 법정은 누가 진정한 죄인이며 누가 정의로운 사람이었는가를 명백히 가려줄 것입니다. 독재의 겨울이 아무리 길고 혹독할지라도 민주주의의 봄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본 피고인은 우리 국민의 위대한 민주 역량과 역사의 필연적 법칙을 굳게 믿으며, 기쁜 마음으로 어떠한 고난도 감수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재판부 여러분께서도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법의 껍데기만을 보지 마시고, 이 사건의 이면에 흐르는 도도한 역사의 조류와 청년 학생들의 순수한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1985년 5월피고인 유시민
서울형사지방법원 항소 제5부 귀중
[출처 : 오유-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