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조희대 대법관이 이재명 후보 2심을 파기환송하였습니다. 사람들 말마따나 교사는 수업에만 신경 써야 하는데, 계엄이 끝날 듯 끝나질 않으니 그것도 당분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제 주변에 '그래도 이재명은 좀...' 하던 친구들이 파기환송 이후로 '이건 너무하잖아...'라면서 돌아섰다는 것입니다.
제가 요 며칠 조희대 대법관을 보면서 떠올린 인물은 이문열 씨의 중편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한병태'입니다. (제가 비록 이문열 씨의 정치적 성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작가로서 이문열 씨는 과연 천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여러 면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는 작품입니다. 아직도 국문학과에서는 이 작품을 1950년대 이승만 정권과 연관지어 해석해야만 합니다. 절대로 1987년, 전두환 씨, 6월민주항쟁과 연결해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이 작품이 1987년 7월에 발표되었지만 말입니다.) 실제로 제가 가르치는 IB Korean A 과목에서는 이 작품을 1980년대와 연관해서 해석하면 큰 감점을 받습니다.
다시 한병태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지금 조희대 대법관이 저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한병태에 대입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이게 문학이 가진 가장 큰 매력들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일단 한병태란 인물은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사실은 엘리트주의에 사로잡힌 인물입니다. 그는 서울의 명문학교에서 전학 온 자신이 시골 학급의 급장이 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것을 '자율과 합리'라고 포장합니다.) 때문에 그는 전학 첫날에 엄석대를 얕잡아보고 도전했다가 처참하게 깨집니다.
그러자 한병태는 돌연 태도를 바꿔 엘리트인 자신을 무너뜨린 엄석대를 숭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비', '폭포같은 은혜', '은총' 등의 표현을 사용해 엄석대를 신격화합니다. (이것이 한병태의 '1차 각성'입니다.)
그리고 한병태는 절정 부분에서 엄석대를 공격하는 반 아이들을 지켜보며 혼자 엄석대의 편에 서서 새로운 담임선생님의 개혁에 저항합니다. 그는 설령 엄석대의 계엄에 정당성이 부족하다고 해도, 국민들이 그를 탄핵하는 것은 더 큰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한병태의 '2차 각성'입니다.)
"내 눈에는 그애들이 석대가 쓰러진 걸 보고서야 덤벼들어 등을 밟아 대는
교활하고도 비열한 변절자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아무튼 한병태는 그 후로도 오랫 동안 엘리트로서 많은 특혜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엄석대가 사라지면서 시작된 사회의 변화에 강한 목마름을 느낍니다.
"일류와 일류, 모범생의 집단을 거쳐 자라가는 동안 나는 두 번 다시
그 같은 억눌림 또는 가치 박탈의 체험을 안 해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명문대 졸업장의 위력도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병태는 오로지 학력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던 그런 세상으도 돌아가기를 꿈꾸게 되고, 자신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엄석대의 부활을 고대합니다. (여기서도 한병태는 그것을 '자율과 합리'라고 포장합니다.)
"정신적인 능력과 학문에 대한 천착의 깊이로 모든
서열이 정해지고, 자율과 합리에 지배되는 곳."
그런데 오히려 한병태 앞에 소년공 출신의 대통령 후보가 등장하고, 국민들 과반 이상이 그를 지지합니다. 아마 그는 세상의 공정과 상식이 송두리째 무너졌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재수마저 실패해 따라지 대학으로 낙착을 보았던 녀석은
어물쩡 미국박사가 되어 제법 교수 티를 냈다."
"나는 급했다. 그때 이미 내 관심은 그런 성공의
마뜩치 못한 과정이나 그걸 가능하게 한 사회 구조가 아니라
그들이 누리고 있는 그 과일 쪽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나도 어서 빨리 그들의 풍성한 식탁 모퉁이에 끼어들고 싶었다."
이제 한병태의 목마름은 최고조에 달하고, 그는 하루빨리 엄석대가 부활하여 잘못된 이 세계를 바로잡아 주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엄석대는 아득한 과거로부터 되살아 나왔다.
공부의 석차도 싸움의 순위도 그의 조작에 따라 결정되고,
가짐도 누림도 그의 의사에 따라 분배되는 어떤 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소설 속 한병태는 형사들에게 끌려가는 엄석대를 목격하고는 쉽게 포기했지만, 현실의 한병태들은 지금도 포기하지 않고 뛰어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과정을 조희대 대법관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의 엘리트들이 과거에는 전두환 씨였던, 그리고 지금은 윤석열 전대통령인 자신들의 엄석대를 부활시키려는 시도로 봅니다. 그만이 학연과 지연에 따라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엘리트들에게 특혜를 몰아주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대한민국은 여전히 1987년을 살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출처 : 오유-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