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이 걸렸네요.
1995년.
제1기 민선 서울 시장인 조순의 선거 참모로서 데뷔를 한 후
곧바로 다음 해 영등포에서 국회 입성에 성공하면서
민주당의 기린아였고
당시 젊은층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던 정치인.
휴대폰은 커녕 인터넷도 극소수의 향유물이었고
삐삐 호출 번호 1004나 8282가 통용되던 시절.
저는 김민석을 열렬히 지지했었습니다.
2002년.
조중동이 대한민국 여론을 기획하고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고 실현하던 시절.
모든 이가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당선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고
경선 불복의 대명사 피닉제가 지 대통령 꿈을 못 버리고
한나라당에서 민주당으로 당적을 바꿔가면서 까지 본인의 권력욕을 드러냈을 때
(웃기지만 당시 민주당도 이인제 대세론이 먹히고 있었음. ㅋ)
아무도 주목 않던 노무현 후보가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승리를 이끌어 내면서
분위기가 급반전했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 월드컵 덕분에 압도적인 인지도를 자랑했던 정몽준 전 축구협회장.
~~ 그나마 정몽준이 가능성 있다.
~~ 여론 조사 밑바닥 노무현은 승리 가능성 제로다.
~~ 우리 노무현 제끼고 정몽준을 세웁시다.
그렇게 합법적이고 민주적 절차를 통해 이인제를 꺽고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을 승리했던 노무현에게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를 주장하는 `후보단일화 협의회`라는 개막장 모임이 결성됐고
그들은 지들 앞에 김민석을 내세웠었습니다. 왜냐구요?
민주진영의 스타였으니까요.
김민석은 선택했고
그는 앞장 서서 노무현에게 정몽준과의 재경선을 주장하며 후단협의 선봉에 섰습니다.
그렇게 저는 김민석을 제 마음 속에서 지웠던 기억이 있네요.
그런데 정몽준과의 재경선(여론조사)도 노무현이 이겼고
정몽준은 승복하는 듯 유세도 같이 다녔지만
대선 투표 바로 전 날!
나 노무현하고 바이바이~~ 지지철회선언.
정몽준 집을 찾아간 노무현을 정몽준이 `문전박대`하던 그 뉴스 영상이
대선 투표일 직전 전국 공중파를 도배했고 모두 끝났다고 생각 했었죠.
노무현이 이김.
똑똑하고, 본인의 신념에 충성하며, 나름의 혜안도 가진 유력한 정치인이라고 믿었었는데
저는 2002년 후단협 사태 이후 그 배신감에 김민석을 극도로 증오했었습니다..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김민석은 언제나 조롱과 놀림의 대상이었고 변절의 상징이었어요.
피닉제가 김민석으로 대체가 됐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후단협 등 2002년 당시 민주당 내홍에 대해서
(2007년)민주당 대의원의 결정으로 다 정리되었다.
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
공화정.
저는 현재 김민석 새총리가 능력과 신념과 양심을 가진 정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민석 새총리의 롱런을 감히 기원합니다.
[출처 : 오유-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