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는 오늘 아침도 먹는 걸로 실랑이다. 밥을 너무도 안먹는 아들 앞에서 엄마는 아들이 한 입이라도 더 먹었으면 싶고, 아들은 그만 먹고 싶고. 엄마만큼이나 지친 아들은 이제 그냥 식탁앞에서 멍하니 음식을 바라보고만 있다. 차마 그만 먹고 싶다고 할수는 없는 아들로서는 이렇게 하염없이 앉아 있는게 최선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모습이 지켜 보는 남자한테는 서로 어영부영 시간과 감정만 소모시키는 걸로 보여서 속상하고 못마땅하다. 차라리 그만 먹게 하고 쉬게 하던가 다른걸 하게 햇으면 좋겠으나 아들 만큼이나 아내 눈치를 보는 남편이다.
그러다 문득 영화 ‘김씨 표류기’ 에서 려원의 상황이 떠 오른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단 한명의 주인공을 뽑으라면 그것은 재영이 아니라 려원이라고 생각한다. 극의 시작과 주요전개는 재영이 중심이지만 등장인물들 관계도에 중심은 려원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극중 려원은 은둔형 외톨이다. 청소년기에 겪은 학폭같은 것으로 입은 상처로 타인들에게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두렵고 그래서 차라리 진실한 자신을 외면하는 삶을 선택한 듯 보인다. 그런 려원 옆에는 엄마가 있다. 엄마는 극중에서 려원이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물질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물론 이것이 딸을 향한 태만이나 무신경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딸을 향한 엄마의 마음씀음 놀라울 정도로 세심하고 배려가 깊어 보인다. 딸이 방 밖으로 나오길 엄마는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라고 있고 딸이 원한다면 별이라도 따다줄 것 같은 심정이지만 정작 딸은 그런것을 원하지 않고 있고 심지어 이래라 저래라는 압박은 고사하고 충고나 조언을 듣는것 조차도 버거운 상태임을 알고 있기에 조심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이 정도가 엄마로써 딸에게 할수 있는 최선으로 보인다. 정리하면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헌실할 수 있을 지언정, 려원에게 엄마는 자기 앞에 어떤 음식이든 가져다 줄수는 있지만 그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끔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음식을 가져다 주는 것과 먹고 싶게 하는 것은 상당히 별개인 것이다.
그런 려원앞에 나타난 또 다른 인물이 재영이다. 려원에게 재영은 말하자면 엄마와는 정반대 역할의 인물이다. 재영은 려원앞에 어떤 음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굳이 섬이 아니라도 말이다. 처지로만 보자면 도움이 필요한 것은 오히려 재영이다. 나아가 재영은 려원이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문제가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사실 이름조치도 모른다). 설사 문제를 안다 한들 려원이 치유되길 바라는 재영의 마음은 엄마의 간절함이나 안타까움에 비할바가 아니다.
그런데 엉뚱하고도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서는 그런 재영이 려원에게 스스로 하여금 밥을 먹고 싶게 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존재가 된다. 려원에게는 그 마음이 달착륙에 버금가는 결심이 필요할 정도로 특별하고도 무거운 것이다. 다시한번 말한다면 음식을 가져다 주는 것과 먹고 싶게 하는 것은 상당히 별개로 보인다.
그럼 재영의 무엇이 려원으로 하여금 굳게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게 한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동질감으로 보인다. 려원의 눈에는 재영이 (현실 세계에는 만나지 못한) 또 다른 세계에서 발견한 또다른 자신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와라면 서로 조금이라도 평범한 사람으로써 조금이라도 진실한 소통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했을 것이다. 그런 반가움이 어떻게든 그와 소통하고 싶은 욕구로 연결이 되고 그런 절실한 욕구가 세상을 향한 려원의 어렵고 무거운 발걸음을 떼게 한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해석한다. 해석이 맞는 것인지도 모르겟고 이것이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게 맞아서 나도 저런식으로 한다고 해서 나도 아들녀석에게 스스로 하여금 맛있게 밥을 먹고 싶게끔 할 수 있을 지는 도무지 확신도 자신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