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령성 출토 새·곰·범 청동장식... 고조선=한·맥·예 연맹 증거

유머

요령성 출토 새·곰·범 청동장식... 고조선=한·맥·예 연맹 증거

콘텐츠마스터 0 3,454 01.11 22:46



<지식카페>요령성 출토 새·곰·범 청동장식… ‘고조선=한·맥·예 연맹’ 증거

17681796362774.jpg요령성 평강지구에서 출토된 ‘새’ 토템족이 ‘곰’ 토템족, ‘범’ 토템족, ‘이리’ 토템족을 휘하에 거느린 동안의 청동장식.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⑦ 고조선 태동과 정치적 기반

- 한민족 고고학

한족·맥족 혼인동맹 통해 출생한 단군이 건국… 예족은 자치권 가진 제후국으로 결합

 

도읍 ‘아사달’은 원래 나라 이름… 아침 뜻하는 ‘아사’·나라 뜻하는 ‘달’ 한자로 의역해 ‘朝鮮’

17681796364823.jpg산동반도 대문구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아사달문양’이 새겨져 있는 팽이형 토기.

‘새’ 토템 ‘한’족의 군장국가 군장 환웅(桓雄)이 ‘곰’ 토템 ‘맥’족의 여군장(부족장)과 혼인동맹으로 그 사이에서 후손 ‘단군’(檀君)이 태어나 성장하자, 단군은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朝鮮)이라고 호칭한 고대국가(나라)를 개국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중국 고문헌으로는 “‘위서’(魏書)에 이르되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壇君)왕검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개창해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高(堯)와 같은 시기이다”라고 역사적 사실만을 간단히 기록했다. 한편 삼국유사에 수록된 ‘고기’(古記)는 ‘단군설화’를 수록하면서 환인의 아들 환웅과 웅녀(熊女:곰 토템 부족 여족장)의 혼인에 의한 한·맥의 혼인동맹 사이에 출생한 아들인 단군왕검의 ‘조선’(朝鮮, 古朝鮮) 개국을 기록했다.

중국 고문헌들에 나오는 ‘한맥’(한貊)도 새 토템 한족과 곰 토템 맥족의 결합에 의한 ‘고조선’과 한국원민족의 형성을 인지한 기록의 한 사례다. 범 토템 ‘예(濊)’족은 다른 방식에 의해 한·맥족과 결합했다. 예족의 고조선 국가에의 결합양식은 일정의 자치권을 가진 ‘후국’(侯國)제도에 의거한 것이었다. 예족에 관한 최초의 고문헌 기록인 ‘일주서’(逸周書) 왕회해(王會解)편에 ‘예인’(穢人)이 나오고, 그 주에는 “예(穢)는 한예(韓穢)이니 동이(東夷)의 별종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韓穢’는 한과 결합한 예 또는 한의 예 의미를 포함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맥·예 3부족 결합의 증거는 고고 유물에서도 보인다. 고조선 강역이었던 만주 요령성 평강지구에서 고조선 후기 커다란 새(독수리, 삼족오)의 지휘와 보호 아래서 곰과 범이 순종하고 있고 그 옆에 이리가 따르는 금도금 장식으로 조각 유물 2점이 출토됐다(왼쪽 위 사진 참조). 이 장식물의 동물은 부족 토템 상징으로서, 커다란 새는 한족의 토템이고, 곰은 맥족, 범은 예족의 토템이며, 이리는 후에 고조선 후국족이 된 ‘실위’족 등 유목민족의 토템이었다. 이 유물은 한족의 중심적 지휘 아래서 고조선이 한·맥·예 3부족이 연맹해 형성되고, 후에 이리 토템 족이 참여했음을 잘 증명해 준다.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언제인가? 종래 여러 가지 견해와 조사연구가 진행돼 왔다.

17681796367134.jpg단군조선의 탁자식 고인돌들. ① 한반도 강동 문흥리 2호 고인돌 ② 요동반도 해성 석목성 고인돌 ③ 요동반도 개주 석붕산 고인돌 ④ 요동반도 대석교 석붕옥 고인돌

(1)삼국유사에서 인용된 위서에서는 고조선의 건국 시기를 고중국의 ‘요’(堯)임금과 동시기라고 했다. 중국에서는 요임금의 즉위년에 대해 무진(戊辰)년설과 갑진(甲辰)년설이 병존했다. ‘동국통감’(東國通鑑, 서거정 편찬)은 무진년설을 택했는데, 구한말에 이를 서기 BC 2333년으로 환산했다. 고조선 건국 시기를 BC 2333년, 즉 BC 24세기로 보는 문헌학적 견해가 정립된 것이다.

(2)고고 유물에서 보면, 고조선 건국 직후 고조선 이주민(중국학자들의 동이족) 소호(少호 또는 少昊)족의 유적인 산동반도 ‘대문구(大汶口)문화’ 유적 상층 유물에서 ‘아사달문양’이 새겨져 있는 고조선 ‘뾰족밑 팽이형(변형) 민무늬토기’ 11점(파손분 포함)이 출토됐다. 이 11개 토기 술잔은 형태가 고조선 특유의 뾰족밑 팽이형 민무늬토기일 뿐 아니라, 토기 위의 잘 보이는 위치에 아사달문양까지 새겨 넣었으니(오른쪽 위 사진 참조), 이것은 고조선 건국 후 산동반도에 이주해간 고조선 이주민의 토기임이 명백한 것이다. 아사달문양 토기의 편년을 취하면, 고조선 건국 시기는 BC 3000년∼BC 2400년 이전으로 볼 수 있다.

(3)북한 고고학자들이 1993년 강동읍의 단군묘를 발굴해 보니 남녀 한 쌍의 인골 잔편이 출토됐다. 두 기관에서 24∼30차 측정한 평균치는 bp 5011±267년(bp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거해 1950년을 기준으로 역산한 고고학의 연대)이었으니, 이 뼈를 단군의 유골로 본다면 BC 30세기경 건국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중국 사회과학원은 1996년 5개년 계획의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의 결과, 중국 최초의 고대국가 하(夏)나라의 건국 연대를 BC 2070년이라고 발표했다. 이것은 고조선 건국 연대 BC 30세기보다 9세기 뒤늦은 것이며, 가장 낮은 연대인 BC 2333년보다 263년 뒤늦은 것이다. 종합해 보면, 환웅 족의 ‘군장국가’ 시기를 제외하고서도, 단군의 고대국가 고조선 건국 시기는 BC 30세기∼BC 24세기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고조선은 BC 30세기∼BC 24세기에 건국된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인 것이다.

고조선의 원래 나라 이름은 ‘아사(시)달’이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인용된 위서와 고기는 고조선의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기록했다. 일연은 이것이 삼국(고구려·백제·신라) 이전의 ‘옛 나라’임을 나타내기 위해 ‘古’(고)자를 붙여서 ‘고조선’(古朝鮮)이라는 항목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朝鮮’은 한자 이름인데, 고조선의 건국 시기에는 한자가 아직 없었으므로, 순수한 고조선말 원래 나라 이름이 있었을 것임은 틀림없다.

위서와 고기에서 고조선의 도읍이라고 기록한 아사달이 바로 고조선의 나라 이름일 것으로 본 기존 학설에 필자는 찬동한다. 고대 역사에서는 도읍 이름과 나라 이름이 동일한 경우가 종종 있는데, ‘아사’는 현대 일본어에서도 ‘朝’를 아사(아침)로 읽으며, ‘달’은 ‘땅·나라’의 뜻이니, 아사달을 뒤에 한자로 의역한 것이 ‘朝鮮’이라고 본 것이다. 고조선의 고조선말 고유의 나라 이름은 ‘아사달’(Asadar)이었다.

고조선의 서변지역과 고중국에서는 ‘사’(sa)가 ‘시’(si)로 변음돼 ‘아시달’(Asidar)이라고도 했다. 여기서 ‘달’은 ‘땅’(land)·‘나라’의 뜻이고, ‘아사’·‘아시’는 ‘태양이 맨 처음 솟는 아침’의 뜻이다. ‘아사달’·‘아시달’은 ‘태양이 맨 처음 뜨는 나라’(land of the sunrise), ‘태양이 맨 처음 뜨는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라는 뜻이다.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은 ‘밝달 아사달’(대박산 아사달)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고조선 나라의 대명사로도 사용됐다. 고중국에서는 밝달 아사달을 ‘發朝鮮’(발조선)으로 번역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밝달’이 ‘發’로 음차표기되고, 아사달이 ‘朝鮮’으로 의역표기돼 합쳐진 것이다. 고조선 첫 도읍지 밝달 아사달의 밝달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고조선 민족의 상징적 호칭 대명사로서도 의미가 확대됐다. 그리하여 고조선 사람들을 밝달 사람, 고조선 민족을 밝달 민족으로 호칭하기도 했다. 후에 밝달을 한자로 번역할 경우에는 ‘倍達’(배달)로 음차표기되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조선의 ‘아시(사)달’(land of the sunrise, 태양이 맨 처음 뜨는 나라)이 ‘아시아’(Aisa: land of the sunrise)와 동일한 뜻을 가진 나라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고조선 서방후국들 사이에서 아사달은 상고음으로는 아시달로 발음되고 있었다. 왜 유럽 사람들은 ‘아시(사)달’이 있는 동방을 ‘아시아’로 이름 붙였을까? 서양인들도 그리스문명 시대에 유라시아대륙의 동방 끝에 태양이 처음 뜨는 곳 ‘아시(사)달’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지 않았을까?

삼국유사, 고기에서는 고조선의 첫 도읍지가 아사달이라 하고, 옮긴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白岳山 阿斯達)이라고 했다. 아사달이 밝달(백산, 白山)과 중첩 사용돼 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밝달은 한자로 ‘白山’(백산), ‘白岳’(백악), ‘朴山’(박산), ‘朴達’(박달), ‘北岳’(북악), ‘檀’(밝달나무 단) 등 여러 가지 한자로 음차표기돼 왔다. 삼국유사에 고조선의 초기 도읍을 단지 아사달로만 기록하지 않고 ‘백악산 아사달’이라고 기록한 것은 고조선의 첫 도읍지를 비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참고가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 강동현(江東縣)조에 ‘대박산’(大朴山)과 ‘아(사)달산’(阿達山) 이름의 연속된 산이 있다. ‘강동군읍지’의 지도를 보면, 대박산의 비탈이 거의 끝나는 기슭 옛 현청 동헌의 뒤에 ‘아달산’이 그려져 있다. 대박산이 ‘큰 밝달’(太白山·태백산의 뜻)과 동일한 것이고, 아달산이 아사달임은 바로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동현조에는 왕릉으로 ①단군묘(檀君墓) ②고황제묘(古皇帝墓)의 2개 고대왕릉이 이 책이 처음 편찬된 15세기까지 남아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단군묘’가 15세기에도 둘레가 410척(약 123m)이라고 했다. 이 거대한 규모는 이 무덤이 왕릉임을 알려준다. 단군묘 등 옛 왕릉이 2개나 15세기까지 남아 있는 곳은 옛 왕조의 도읍지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강동군읍지’에는 강동현에 조선 후기까지 ‘황제단’(皇帝壇)이라는 제천(祭天)용 거대한 ‘제단’이 남아 있었는데, 둘레가 607척(약 182.2m), 높이가 126척(약 37.8m)이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거대한 제단은 여러 계단의 피라미드형 큰 제단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7681796369408.jpg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동현조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왕궁터’(대궐터)까지도 찾을 수 있다. 이 고문헌은 강동현의 마을들 가운데서 특히 6개 마을을 별도로 구태여 ‘고적’(古跡)으로 분류했는데, ①잉을사향(仍乙舍鄕) ②기천향(岐淺鄕) ③반석촌(班石村) ④박달관촌(朴達串村) ⑤마탄촌(馬灘村) ⑥태자원(太子院) 등이다.

이 6개 마을 가운데, ‘이두’로만 읽히는 마을이 ‘잉을사향’(王宮里의 뜻)이다. 이것을 이두식으로 풀어 읽으면, ‘임금집마을’=‘왕궁리’(王宮里)가 된다. 이곳이 고조선의 왕궁이 있던 ‘터’임이 명칭으로 남겨져 전해온 것이다. 잉을사향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15세기에는 ‘용흥리’(龍興里)로 호칭됐다. 그 주변 문흥리에는 고조선 왕의 무덤으로 보이는 거대한 탁자식 고인돌도 남아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조선은 개국 후 2번 천도했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왔다고 했다. 천도는 부수도와 관련돼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경우에도 ‘강동(江東) 아사달’은 ‘원도읍’으로서 계속 존속됐다고 추정된다. 요컨대 고조선의 첫 도읍은 대동강 중류 동쪽 ‘강동 아사달’이었고, 그다음 천도한 두 번째 도읍은 요동의 ‘개주(蓋州) 아사달’이었다고 본다. 개주지구 주위에 거대한 왕릉인 탁자식 고인돌이 지금도 10여 개 남아 있고, 그 주변에 다시 또 다수의 탁자식 고인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를 알 수 있다.



■ 용어설명

아사달·아시달
고대 역사에서는 도읍 이름과 나라 이름이 동일한 경우가 종종 있다. 고조선 고유의 나라 이름은 ‘아사달’(Asadar)이었다. 고조선의 서변지역과 고중국에서는 ‘사’(sa)가 ‘시’(si)로 변음돼 ‘아시달’(Asidar)이라고도 했다. 여기서 ‘달’은 ‘땅’(land)·‘나라’의 뜻이고, ‘아사’·‘아시’는 ‘태양이 맨 처음 솟는 아침’의 뜻이다. ‘아사달’·‘아시달’은 ‘태양이 맨 처음 뜨는 나라’(land of the sunrise), ‘태양이 맨 처음 뜨는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의 뜻이다. 고조선의 ‘아시(사)달’은 그리스문명 시대에 유라시아대륙의 동방 끝에 태양이 처음 뜨는 곳 ‘아시아’의 어원이 아닐까.

檀君
단군(檀君)은 박달임금의 뜻이며, 음가만으로는 ‘天王’의 뜻이다. ‘단군’은 고조선 건국 왕(임검)일 뿐 아니라 ‘황제’(皇帝)였다. 뒷날 상(商)에서 만든 한문자 ‘皇’ 자 그 자체가 ‘박달임금’(白+王)을 합해서 단자·단음화한 것이라고 본다. 고조선은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였으므로, 건국 무렵에는 오직 ‘단군’만이 ‘皇’이었다.


고조선의 중국식 표기 ‘고죽’ … 中 청동 술단지에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1768179637166.jpg1973년 중국 요령성 객좌현 북동촌 매장지에서 발굴된 청동기의 일부. 상(商)나라의 은허(殷墟) 청동기보다 더욱 앞선 청동 제기들 중 하나에 ‘父丁孤竹亞微(부정고국아미)’라는 명문이 있어서 고죽국(孤竹國)의 청동기라는 사실이 증명됐다.(큰 사진) 상나라 시대 고죽국이 있던 위치.(중국 사회과학원 지도를 바탕으로 국경은 당(唐) 시대 자료에 의거해 필자가 추가·작은 그림)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⑨ 새로 찾은 고조선 연방 고죽국

BC 21세기 건국해 조양~천진 이르던 고조선의 후국 … 공자도 도덕·예의 있는 ‘군자국’ 칭송
‘아사달’문양 청동화폐로 상업·무역 발달 … BC 3세기초 燕의 장수 진개 침공 받고 멸망


17681796374376.jpg
 

1973년에 중국 요령성 객좌현 고산(孤山) 북동촌(北洞村) 산기술 제1호 매장지 구덩이에서 상(商)나라 후기 수도 은허(殷墟)에서 발굴된 청동기보다 시기도 앞서고 더욱 선진한 청동예기 6점이 발굴됐다. 그중에 청동·술단지 제기 하나에 ‘父丁孤竹亞微(부정고국아미)’라는 명문이 있어서 이 청동기들이 고죽국(孤竹國)의 청동기라는 사실이 증명됐다. 이어서 부근의 제2호 매장지에서 또 6점의 청동기가 출토됐다.

고죽국 청동기가 12점이나 발견되자, 중국 학계에서는 고죽국을 상(商)의 제후국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이웃인 하북성(河北省) 당산(唐山)시 대성산(大城山) 유적에서 구멍 뚫린 자연동(紅銅·홍동) 장식물 2점이 1959년에 출토됐는데, 중국에서는 이것을 BC 2000년경의 중국 최초의 동기(銅器)로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고문헌들이 ‘고죽국’을 중국의 조상국가가 아니라 ‘동이족’의 국가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에서 맨 처음 ‘고죽국’이 조선사람의 조상국가라고 주장한 학자는 성호 이익(李瀷)이다. 이익은 명나라 지리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조선성(朝鮮城)이 북경에 가까운 영평부(永平府) 경내 있다는 글을 읽고, “고죽국은 영평부에 있었다. 고죽국 세 임금의 무덤과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묘(墓)도 그곳에 있다”고 했다.(‘성호사설’) 이익은 고죽국이 고조선 후국임을 잘 인지하여, “고죽의 옛터가 오늘의 요심(遼瀋)에 있으면서 북해(北海, 발해)의 바닷가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단군(檀君)…시대에 이 고장은 조선(朝鮮)에 통합됐다”고 기술했다. 이어 신채호 선생이 중국 고문헌 ‘수문비고(修文備考)’에 “고죽국은 ‘조선종(朝鮮種)’”이라 하였고, “고죽은 9족(九族, 조선족의 별칭)의 하나”라고 했다.(‘조선상고문화사’)

17681796376369.jpg‘孤竹亞微(고국아미)’ 명문이 새겨진 객좌현 북동 1호 출토 고죽국 청동기(위). 객좌현 소파태구 출토 고죽국 청동예기(아래).

필자도 신채호 선생을 따라 추적해보았더니, 중세 중국학자들도 ‘고죽국’이 동이족 고조선 국가임을 알고 있었다. ‘일주서(逸周書)’ 왕회편에서는 ‘고죽’을 불령지, 불도하, 산융 등과 함께 들었는데, 공영달은 이들은 모두 동북이(東北夷)라고 했다. 북경대 도서관에 수장된 ‘황명수문비사(皇明修文備史)’의 ‘구변고(九邊考)’는 ‘고죽국을 조선과 함께 동이족’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에 필자는 확신을 갖고 ‘고죽국’의 실체를 탐구하여 2013년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고죽국은 명칭부터 고조선의 후국이었다. 고대 중국에서 고죽국은 ‘孤竹’ 또는 ‘고주(孤廚)’로 표기했다. 고조선 호칭을 음차 기록한 것이다. ‘孤竹’이란 한자 명칭은 고조선이 왕족 지방통치자에게 붙이는 ‘고추가(古鄒加)’에서 나온 것으로서, ‘고추가가 다스리는 나라’의 의미로 성립된 것이었다. 고조선은 중요한 후국에 대해서는 ‘가(加)’ 가운데서도 ‘고추가’를 파견하거나, 또는 후국의 제후를 왕실 혼인을 통해 ‘고추가’의 최고 ‘가’ 칭호를 주었다. ‘古鄒’의 고중국어 방언(客話) 발음도 ‘Kutseu’이고, ‘孤竹’의 고중국어 방언 발음도 ‘Kutsu’이며, ‘孤廚’의 고중국 방언 발음도 ‘Kutshu’로서 거의 완전히 동일하다. ‘고추가’의 ‘고추’를 고중국에서 ‘孤竹’ 또는 ‘孤廚’ 등으로 달리 표기한 것은 원래의 고죽국 이름은 고조선 언어로 된 명칭이었고, 그 고조선 말 이름을 여러 가지 유사발음의 다른 한자를 선택해서 표기했기 때문이었다.

BC 7세기경 고죽국의 후왕은 ‘답리가(答里呵, 고대음 다리가·Tariga, Dariga)’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답리+가’로서, 이때의 ‘가’는 ‘고추가’인 것이다. 여기서 ‘고죽국’(Kutsu국) 명칭 그 자체가 고죽국은 고조선의 고추가가 통치하는 ‘후국’임을 나타낸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조선 후국 고죽국은 언제 설치되었을까? 고죽국은 고조선이 건국 후 난하를 건너서 고중국 관내 지역으로 진출하던 시기에 난하 양안에 설치되었던 고조선 최서변 후국의 하나였다. 고죽국의 설치시기는 BC 21세기경의 매우 이른 시기에 성립됐다. 중국 고문헌들은 하(夏)나라를 건국한 선주민 장수 헌원(軒轅)이 동이족 장수 치우(蚩尤, 고조선 이주민 장수)와 대결하여 탁록(탁鹿) 대결전에서 승리하여 하(夏)를 건국하고 국왕이 됐는데, 후에 중국인들이 헌원을 황제(黃帝)로 추존하여 중국 고대국가 건국 시조로 삼는다고 설명해 왔다.

‘탁록’은 난하를 건너 지금의 북경의 서쪽 120㎞ 지점에 있는 벌판이다. 지금의 하북성 탁록현에 속한다. 최근 중국의 고대사학자들은 헌원과 치우를 실재인물이며, ‘탁록벌 전투’도 사실로 인정한다. 중국은 하(夏)의 성립 시기를 BC 2070년(BC 21세기)으로 추정했고, 하왕조의 존속기간을 BC 2070년∼BC 1600년으로 추정했다. 하(夏)의 건국연대 BC 2070년대 설을 받아들인다면, 고죽국 설치는 하(夏)의 건국보다 약간 먼저였으니, 고조선의 고죽국 설치는 늦어도 BC 21세기경이 된다.

고죽국의 위치는? 당(唐) 시대의 ‘통전(通典)’ 북평군 평주조에서 “평주는 지금의 노룡현(盧龍縣)이다. 은(殷) 시대에는 고죽국이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통전’ 영주(營州)조에서는 “영주는 지금의 유성현이다. 은(殷) 시대에는 고죽국지(孤竹國地)였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상·은(商·殷) 시대에 고죽국이 매우 강성하여 지금의 대릉하 유역 조양(朝陽) 지구도 영유했음을 기록한 것이었다.

중국 사회과학원이 편찬한 ‘중국역사지도집’에서는 ‘고죽국’을 난하 하류 유역에 표시했다. 그러므로 ‘고죽국’ 영역은 당(唐) 시대의 유주(幽州)·계주(계州)·평주(平州)·영주(營州)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주가 서쪽이고 영주가 동쪽이었다. 고죽국의 도읍은 난하의 동쪽 강변 노룡(盧龍)이었지만, 고죽국의 서변은 난하를 건너 서쪽으로 지금의 천진(天津)까지였다. 백랑수(지금의 대릉하) 유역과 지금의 조양(朝陽) 지역은 영주(營州) 지역이므로 고죽국의 통치를 받던 고죽국의 영지였다. 고죽국은 난하를 가운데 두고 그 동쪽은 ‘조양’과 서쪽은 ‘천진’까지에 걸친 고조선의 후국이었다. 즉 고조선 시기에 발해만 북쪽 해안에 고조선 후국 고죽국이 있었으며 중국인들은 고죽국과 고죽국 수도 ‘고죽성’을 ‘조선’이라고 인식했었고, 명나라 시대에는 영평부 소속 ‘조선성(朝鮮城)’으로 편제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이 소위 ‘동북공정’을 시작한 전후부터 고죽국을 고중국의 상(商) 또는 연(燕)의 후국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나오는데, 전혀 사실이 아닌 억설이다.

17681796378842.jpg영성현 소흑석구 출토 고조선 번개무늬 다뉴조문경.

고죽국은 발해만 연안에 설치된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고조선에서 파견된 고추가가 통치했다. 그 역사적 증거로는 BC 7세기 중엽에 고조선과 고중국이 국경 전쟁을 하게 됐는데, 중국 측 산동반도의 제(齊) 환공(桓公)은 노(魯)·연(燕)·진(晉) 등과 연합국을 편성했다. 이에 대항하여 고조선 측은 고죽(孤竹)이 중심이 되어 불리지(弗離支, 또는 영지·令支)·산융(山戎)·도하(屠何) 등이 고조선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중국(周, 齊, 燕…등) 연합군에 대항하여 고조선을 방어했다. 이때 고죽국은 고중국 연합군에 대항해 고조선의 중심세력이었음이 고중국 측 문헌 ‘관자(管子)’에 기록돼 있다. 이때 제의 환공에 대항해 싸운 고죽국 장군이 황화(黃花)였고, 고죽국 군주의 성씨는 묵(墨) 씨였으며, 호칭은 고조선 고추가인 답리가(고대발음 다리가)였다.

BC 3세기에 편찬됐다는 ‘산해경(山海經)’, 해내경에는 ‘조선(朝鮮)’이 나오는데,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과 천독이라고 한다”고 기록했다. 또 ‘산해경’ 해내북경에서도 “조선은 열양(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이고 산의 남쪽이다”고 서술했다. 여기서 중국의 동해를 황해로, 북해를 발해로 해석하면, ‘산해경’의 ‘조선’은 ‘통전’의 ‘고죽국’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즉 고중국에서는 ‘고죽국’을 ‘조선’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죽국은 어떠한 정치를 하던 고조선 후국이었는가? 고죽국은 매우 이른 시기에 율령을 제정하여 통치한 율령국가였다. ‘서경’에 고죽국 왕자 백이(伯夷)의 업적으로 “법령을 제정하여 백성들을 (자의적) 형벌로부터 막았음”을 든 것은 고죽국에서는 매우 일찍 ‘율령’에 의한 통치 행정이 시행되었음을 기록한 것이다.

고죽국에서는 청동기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현재 중국의 가장 오래된 황동(黃銅) 2점도 당산(唐山)에서 출토됐는데, 고죽국 청동기였다. 1973년에 고죽국 영토였던 요령성 객좌현 북동촌의 두 매장지에서 출토된 12개 청동기 가운데 한 예기(禮器)에는 “고죽국의 아미(亞微)”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고죽국의 청동기임을 알려주는데, 당시로서는 최고수준의 청동기였고 상(商)의 청동기의 원류가 된 것이었다.

고죽국에서는 청동기수공업과 함께 고조선지역과 고중국지역을 소통 교류하는 상업과 무역도 매우 발전했다. 상거래에는 청동 주조화폐로 ‘고죽명도전(孤竹明刀錢)’과 ‘명화폐(明化幣)’ ‘일화폐(一化幣)’가 사용됐다. 필자는 중국 산동반도 대문구문화유적에서 1979년 발견된 11점 토기 술잔의 문양이 고조선 민족을 상징하는 ‘아사달’ 문양임을 이미 밝힌 바 있다. 고죽국이 고조선 고죽국 청동 화폐에 ‘아사달’ 문양을 주조하여 조선화폐임을 표시한 것인데, 1928년에 일본학자들이 이 문양을 ‘명(明)’자로 잘못 해석하여 ‘명도전(明刀錢)’이라고 호칭하고 중국 학자들이 연(燕)나라 화폐로 잘못 분류해서 지금까지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명도전과 명화폐 및 일화폐는 고죽국 화폐였다.

특히 이 중에서도 고죽국 ‘명도전’은 고조선 연방 전역과 고중국에서 고죽국의 왕성한 상업·무역에 병행하여 국제화페로 널리 사용됐다.

고죽국은 기본적으로 농경국가이면서도 목축을 병행하여 발전시켰으며, ‘말’을 대대적으로 사육하여 ‘기마문화’를 발전시켰다. 고죽국은 ‘기마문화’에 기반하여 기병부대를 창설해서 고조선 후국이 된 다른 기마유목민족들과 함께 때때로 연합군을 편성하여 작전했다. 고죽국은 고중국의 어느 한 후국이 고조선을 침노하게 할 때는 사전에 막아 방어해주는 서번(西藩)의 지위와 역할을 잘 수행했다.

고죽국은 이미 고대에 도덕과 예의가 확립된 선진적 문화국가였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고죽국을 예의와 도덕이 확립 발전된 ‘군자국’이라고 보았으며, 노(魯)나라에서 도덕이 바로 서지 못하면 구이(九夷)의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여기서 ‘구이’는 ‘고조선’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노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고죽국’을 가리킨 것이었다.

고죽국에서 성인에 버금하는 ‘백이’ ‘숙제’가 나와 역사에 영구히 기록된 것은 우연한 돌출이 아니라 고죽국의 확립 발전된 예의와 도덕에 기반한 것이었다. 사마천도 ‘사기(史記)’에서 ‘백이열전’을 쓰면서 고죽국이 효(孝)와 인(仁) 등 도덕과 예의가 확립된 나라임을 확인했다.

고죽국은 BC 3세기 초기에 연(燕)의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을 침공하여 1000여 리의 땅을 빼앗을 때, 진개의 침공을 받고 멸망했다. 그 바로 뒤에 고조선 후국 동호(東胡)가 반격을 가하여 지금의 조양(朝陽) 지구 등(唐 시대의 營州지역)은 회복했으나, 고죽국의 본래 영지(唐 시대의 유주·계주·평주지역)는 회복하지 못했다. BC 206년경에는 산융이 동호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고죽국의 ‘영주지역’은 산융의 영지가 됐다. 연에 뒤이어 진(秦)의 시황(始皇)이 고죽국의 옛 영지 가운데 난하 하류 유역(당 시대의 평주 지역 일부)을 진나라 안으로 포함해 넣어 갈석산(碣石山) 부근에 이른바 ‘만리장성’을 수축했기 때문에, 산융의 기병부대도 고죽국의 ‘유주·계주·평주지역’을 회복하지 못했다.


■ 용어설명

고죽국(孤竹國): 백이·숙제(伯夷·叔齊)로 잘 알려진 고죽국은 현재 중국에서 은(殷)나라의 제후국으로 기록돼 있지만, 많은 사료·유물은 고조선의 후국(侯國)임을 말하고 있다. 고죽국은 발해만 연안에 설치된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고조선에서 파견된 고추가가 통치했다. BC 7세기 중엽 고조선과 고중국이 국경 전쟁을 할 때 중국 측 연합국에 대항하여 고조선 측은 고죽(孤竹)이 중심이 돼 연합군을 편성해 방어했다. 이는 고중국 측 문헌 ‘관자(管子)’에 기록돼 있다.


대동강유역서 출토된 세밀한 청동공예품… 中문명보다 1000년 앞서



17681796381128.jpg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③ 동아시아 최초 청동기문화

한반도 서북 평남 성천군서
BC31세기 첫 청동조각 발견
용곡리지역 비파형 청동창끝
고조선 성립 BC26세기 추정

특유의 청동거울 ‘다뉴조문경’

Comments

Category
반응형 구글광고 등
State
  • 현재 접속자 1,133 명
  • 오늘 방문자 34,202 명
  • 어제 방문자 53,699 명
  • 최대 방문자 62,252 명
  • 전체 방문자 2,535,786 명
  • 전체 게시물 117,503 개
  • 전체 댓글수 0 개
  • 전체 회원수 89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