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유머

추락

심해열수구 0 43,028 09.07 19:49

 

  "후우.."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누군가의 독백이 흘렀다.


텅빈 공허함을 달래려는 듯.


침묵에 휩싸인 공간에선 희미한 소리마저 돋보일 것이다.


온통 어둡고 낯선 차가움이 지배하는 이곳이 적절한 예시이다.


삭막함만이 감돌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었는데 마냥 까맣진 않았단 것이다.


전방에 펼쳐진 광경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하얗게 반짝이는 꼭 보석같은 무언가가 점처럼 박혀있어 

 

밤하늘의 별들을 연상케 하고 있던 것이다.


이상한 건 사방에 보석으로 빼곡한 점이다.



                       1 



 누군가 창을 통해 어느 방에 침투했다.


침입자는 어둡고 밀폐된 방 안을 푸른빛 하나로 조심스레 살피기 시작했다. 


깜깜한 지하실을 휴대용 조명의 빛줄기로 더듬는 것처럼. 


푸른빛이 방 한쪽에 놓인 어떤 큼지막한 검은 물체를 포착했다.


물체는 기름을 칠한 듯 표면이 매끄러웠고, 그로 인해 푸른상이 맺혔다.


차갑고도 검은 빙판. 


푸른빛의 발레리나는 빙판 위를 비스듬한 궤적으로 미끄러져갔다.


그때, 돌연 섬광이 번쩍임과 함께 방 안은 환하게 물들었고,


갑작스런 하얀 어둠은 검은 빙판의 여제를 삼켜버렸다. 


허나 그것도 잠시,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여제.


찰나동안 방 안을 적셨던 흑과 백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


새로운 변화가 그녀를 찾아왔다.


     "플레이아데스."


     "청색의 젊음을 발하며 밤하늘에 찬란히 빛나고 있는 별들의 무리!"


누군가의 말이 들려왔다.


     "후우.. 어둠은 언제나 빛을 갈망하는 법."


방 안이 환해졌다.


     "라발스."


라벨의 곡이 방 안을 울린다.


큼지막한 검은 물체의 떨림을 통해.


     "검은 빙판.. 발레리나.."


그랜드 피아노 특유의 묵직하고 섬세한 소리는 일품이었다.


주름 없는 차갑고 단단한 손가락이 흑건과 백건을 어루만지며


연주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후우.. 좋아 좋군."


흡족한 듯 피아노 건반의 덮개를 조심스레 닫았다. 


한 쌍의 푸른빛이 덮개 위에 얕게 서렸다.


창쪽으로 걸음을 옮긴 그는 바깥을 내다봤다.


시야에 들어온 건 밝게 타오르는 푸른별이었다.


     "검은 빙판.. 발레리나.."


방 안은 어두워졌고, 발레리나는 보이지 않았다. 


깜깜해진 방과 선명히 대비되는 건 그의 눈이었다.


푸른별이 그의 동공을 물들인 듯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후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고개를 떨군 채 힘없이 말한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손을 들어 창 밖을 가리켰다.

 

손 끝이 향한 곳엔 푸른별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어떤 신호였는지 어느 순간 방 안이 조금씩 흔들렸다.


흔들림은 이내 거대한 떨림으로 변하며 방 안을 크게 울리기 시작했고,


떨림은 그가 있는 방 너머 큼지막한 무언가에 전해졌다.


그것은 한 차례 크게 떨쳐 울린 뒤 무언가 발진하는 소리를 끝으로 잠잠해졌다.


      "검은......"


새롭고 낯선 변화 앞에 감정을 추스려는 듯 


그는 차갑고 단단한 자신의 손을 어루만지며 무어라고 속삭였다.


이윽고 이젠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이 가까워진 푸른별이 


그의 눈을 푸른 어둠으로 멀게 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푸른별을 응시할 뿐이었다.


  

                       


                      

 꿈속에서 날고 있었다.


문득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온통 푸른빛깔 뿐.


아직 덜 깬 것인가.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어렵지만 아무튼 날고 있었다.


허공에 떠 있어서 자유롭게 날고 있는 것 같았지만서도 

 

왠지모를 불길한 무력감이 스쳤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발이 결코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영원히 추락 중일지도..

  

           

                        2

 


 둥근 천장 어딘가에서 재즈 풍의 경쾌하고 세련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 도입부.


검은 정장을 입은 우람한 체격의 연주자가 볼이 빵빵한 채로 관악기를 힘껏 부는 장면이 연상된다.       

                         

고대 로마 판테온 신전의 건축 양식을 모방한 듯한 둥근 돔 형태의 천장은 

 

그 자체로 미관상 나무랄데 없이 썩 훌륭했다.


판테온 신전처럼 돔 중앙에 네모난 구멍이 있었고, 투명한 유리로 막혀 있었다. 


    "아시모프."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이곳에 공간감을 불어넣었다.

      

         "자동 항법 모드"


         "항로내 위험 물체 없음"


         "선체 구획 이상 없음"

      

         "목표 진입 속도 설정 완료"


기계같은 일정한 톤의 답이었다.


     "후우.. 좋아 순조롭군."


순조롭게 진행되던 거슈윈의 곡이 클라이막스 부분으로 돌입하였다.


여러 악기들의 조화로운 하모니가 어떤 구도를 떠올리게 했다.


그에겐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일렁거렸다. 


감상에 젖은 것 같았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푸른빛을 머금은 채.


      "마지막이군."


피날레를 장식하며 곡이 끝났다.


무대가 끝난 뒤, 어두워진 공연장처럼 불현듯 암막에 젖어든 천장 밑.


별안간 금속 마찰음 같은 날카롭고 둔탁한 소리가 일정한 리듬으로 이곳을 울렸다.


어둠을 헤집고 빛나는 그의 두 눈이 어떤 궤적을 그리며 천장 밑을 맴돌고 있던 것이다. 


      "검은 빙판.. 발레리나.."


그는 차갑고도 검은 빙판 위를 가르는 푸른 눈동자의 발레리나였다. 


      "후우.. 이제 뭘 해야할지.."


그는 고개를 들고 돔 중앙의 구멍을 바라봤다.


투명한 유리로 막힌 구멍에 보석들이 촘촘히 박힌 채 반짝거렸다.


아득히 먼 길을 달려온 빛들이 천장에서 쏟아지고 있던 것이다.


그에겐 저 구멍은 우주의 심연을 볼 수 있는 또다른 눈이었다. 


절대 다다를 수 없는 망망한, 끝없는 절망감이 도사리는 곳.


고대 로마인들은 판테온 신전을 통해 이미 심연을 본 것일까.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로 영겁의 시간을..


 




 같은 꿈을 꾸었다.


이번엔 무력감보단 두려움이 온 몸을 감쌌다.


밑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추락 중인 것이 확실했다.


이대로 끝인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추락의 굴레에 빠질 것인가..  



                     3



        (경고!)

 

              (삐삐!)


        (경고!)


              (삐삐!)


      "아시모프!!"

 

 시끄러운 경고음과 함께 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열기에 휩싸여 불덩이가 된 선체는 금방이라도 불타 재가 될 것만 같았다.


            "진입 절차 가동 중"


            "긴급 상황 발생"


            "선체 이상 확인"                      

                      

고온의 열기가 선체 내부에도 고스란히 전달되었고,


아지랑이들이 춤을 추며 일렁거렸다.


이대로 끝인 것인가.


이대로 추락하는 것인가.


그는 꼭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가 보고 있는 모든 게 붉은 열기에 휩싸여 일렁거리고 있었다.


또한 판테온 신전이 그의 시야에서 상하,좌우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아시모프.."


나지막히 불러보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이건.. 지..진짜가 아니야.."


      "이대로.. 끄..끝인 건가.."


      "이대로.. 추락하는 건가.."


      "영원한.. 추락.."


      "......."






 문득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온통 푸른빛깔 뿐이었다.


그의 몸은 눕혀진 채 출렁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들어온 건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였다.


틀림없는 물로 된 바다였다.


     "꿈이 아니야!!"


기쁨에 겨운 나머지 환호를 내질렀다.


둥둥 떠 있는 자신의 몸을 틀어 바닷물에 두 손을 담가 얼굴에 흠뻑 뿌렸다. 


     "아시모프!"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구름에 가려졌던 해가 모습을 드러내며 그의 동공을 더욱 푸르게 빛나게 했다. 


     "아시모프.."


그의 눈엔 물이 맺혀 있었다.


그때, 지직거리는 수신음과 함께 익숙한 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무사히 귀환한 것을 환영한다"

 

           "지구 귀환 임무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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