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바람

유머

봄날의 바람

오호유우 0 74,432 06.1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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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따스해진 날에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던 때에 나의 부모는 땀을 흘리며 그들의 밭을 일구었다

딸 셋을 그리 키워냈다

봄에 꽃구경을 시켜주고 싶어서여름에 시원한 수박을 먹었으면 해서가을에 새 옷을 선물하고 싶어서겨울에 추위에 떨지 않았으면 해서

봄은 그 모든 바람의 시작이었다

새벽부터 온몸이 땀에 젖도록 밭을 일궜다

씨앗을 잘 심지 못하면 싹이 나지 않는다

싹이 나더라도 밤낮으로 물을 주지 않으면 잎이 자라지 않는다

잎이 나더라도 들여다보지 않으면 벌레가 들끓는다

밭에서 자라던 그들의 새싹은 세 딸과 같았다

밭도아이도그들의 돌봄 속에 무럭무럭 자라났다.


막내인 나는 봄에는 꽃구경하고여름엔 시원한 수박을 먹고가을엔 새 옷을 입고서겨울엔 따뜻한 이불 속에 있었다

잘 가꿔진 밭에서 쑥쑥 컸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언니들이 독립한 후에는 부모님과 셋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봄은 년 중 가장 바쁜 계절이었고 그들의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 부족한 시간 속에서그들이 흘린 땀 속에서 나는 자랐다.


열다섯질풍노도의 시기라는 그 나이에 나는 매서운 바람이었다

오매불망 언제 오나 부모님의 트럭을 찾던 내 눈빛이 변했다

하교 시간에 맞추어 오던 그들의 흙 묻은 장화와 낡은 트럭이 부끄러워졌다

함께 집으로 가던 때면 엄마는 종알종알 오늘은 어땠어친구들이랑은 잘 놀았어?' 하며 묻곤 했다

늘 듣던 엄마의 물음이 그날따라 귀찮았고그날따라 엄마의 파란 장화에 묻은 흙이 많았다

길가에 줄지어 흔들리던 분홍색 벚꽃잎이 샘나게 예뻤다

그래서 심술을 부렸다.


엄마다른 애들 엄마 아빠는 다 승용차 타고 다니잖아멀끔한 옷 입고 다니잖아… 나 데리러 올 때만큼은 좀 씻고 오면 안 돼엄마는 왜 만날 더러운 장화야우리도 승용차 타면 안 돼?”


마음을 떠다니던 말이 목구멍으로 쏟아져 나와버린 때에 엄마의 표정을 기억한다

주워 담을 수 없게 쏟아져 버린 말들이 엄마의 작은 가슴 밭에 기어이 구덩이를 파냈다

내가 나를 키운 밭을 갈아엎었다

커다란 쇠쟁기를 꽂아 사정없이 푹푹 헤집었다.


알았어그러자그렇게 하자.”


목이 메 간신히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만개한 벚꽃 사이를 달리는 그 트럭 속 땀에 젖은 엄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얼굴에그 목소리에봄바람에 날아가던 정신이 들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달리는 트럭 안에서 박박 눈을 문질렀다

아마 엄마는 나 때문에 울지 못했으리라

서럽게 우는 아이의 앞에서 부모는 그저 헤집어진 가슴을 부여잡았을 테니.


나 이제 버스 타고 다닐게.”


나는 이제 버스를 타겠노라선언했다

새벽에 첫차를 타지 않으면 다음 버스는 시간 뒤에 오는 시골에서 부모는 아침잠이 많은 딸을 위해 트럭을 몰았다

그리고 나는그런 부모의 사랑을 제쳐두고 내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 뒤로 부모님은 학교에 오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집에 다녀왔습니다’ 할 때면 종알종알 내 하루를 묻던 엄마가 그리웠다

낡은 트럭에서 나누던 이야기들이 참으로 귀한 것이었다

나누는 말의 마디가 짧아지기 시작한 때에 나는 그렇게 철이 들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부모님은 까만 승용차 한 대를 샀다

그 차를 나에게 소개하던 엄마의 신이 난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다

이제 괜찮아우리 딸 보러 가도 괜찮아?'하고 묻는 듯한 탓에 목이 메었다

매끈하게 빛나던 그 차에 올려진 부모님의 거칠고 투박한 손은 모두 나 때문이었다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서늘한 봄에 열린 내 입학식에 엄마와 아빠는 그 차를 타고 왔다

옷장 깊은 곳에 넣어뒀던 가장 멀끔한 옷을 입고 샛노란 프리지어 꽃다발을 안고 왔다.


입학 축하해엄마 괜찮아머리가 좀 이상한가?”


분홍 머리핀을 꼽고 꽃처럼 웃음 지으며 연신 묻던 우리 엄마가 게서 가장 예뻤다.


입학 축하한다.”


넥타이를 맨 아빠가 나를 품에 안고 굳은살이 다 박인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를 키운 그 밭의 흔적이었다

내가 쇠쟁기로 헤집어 놓은 그 밭이 결국 다시 나를 보듬었다

영원히 나를 키울 밭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하교 시간에 년 내내 먼저 와 나를 기다렸다

자율학습이 끝나는 밤 0시에 단 한 번도 나는 부모님을 기다린 적이 없다

우리의 까만 승용차에선 항상 비누 냄새가 났고흙 묻은 장화는 더 이상 거기에 없었다

나는 나중에야 그 낡은 트럭이 내가 태어나던 해에 산 것임을 알았다

새하얀 트럭을 사던 때에 부모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의 아이가 자라나는 모든 순간을 함께할 트럭을 사던 때에 얼마나 설레었을까

내 기억 속 트럭은 어석더석 잘라 붙인 콜라주 사진이었지만 그들에게 그 트럭은 길고 애틋한 한 장의 파노라마였다.


녹음이 세상을 덮고 그 사이로 향기 좋은 바람이 불어오면 어느 농부의 딸은 마음 한구석이 시려온다

벚꽃이 만개해 바람에 날리면 엄마의 흙 묻은 파란 장화와 낡은 트럭을 생각한다

제멋대로 헤집어 놓은 밭에 봄물이 들어 그 흔적이 아스라이 잊히기를명지바람 불어 기분 좋은 봄 내음만 남기를

그것이 영원한 내 봄날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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