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사연팔이 소녀 (성냥팔이 소녀 패러디)

유머

거짓 사연팔이 소녀 (성냥팔이 소녀 패러디)

미스터부기 0 45,638 03.06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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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이라고 하기엔 불과 2024년의 일이었다.

추운 겨울날, 한 소녀가 서울 상암동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소녀의 주민등록증에는 '만 19세'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실제 나이는 스물여섯.

게다가 남편도 있었다.

이쯤 되면 소녀가 아니라 아줌마 아니냐고?

닥쳐. 이건 동화니까 소녀라고 부르는 거다.


소녀는 채널A 본사 앞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 오늘도 돈을 못 벌어오면 알코올중독인 아버지가 나한테 뭐라고 할 텐데…"

사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이 아니었다.

대기업에서 성실하게 근무하는 모범 직장인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방송에서는 '알코올중독 아버지'가 더 먹히니까.


소녀는 채널A 건물을 올려다보며 상념에 잠겼다.

'아, 나도 저 따뜻한 이만갑 촬영장에 있었으면…'

'출연료 50만원 받고, 촬영 끝나면 출연자들이랑 회식하면서 맛있는 거 먹고…'

'PD님이 "오늘 증언 좋았어요~" 하면서 등 토닥여주고…'

꿀꺽.

소녀는 침을 삼켰다.

오늘은 출연을 결정하는 방송작가와의 면접날이었다.


소녀에게는 필살의 사연이 있었다.

고향 친구가 실제로 겪은 이야기.

탈북 과정에서 있었던 처절하고 눈물겨운 사연.

이걸 마치 자기가 겪은 것처럼 풀 예정이었다.

'크크크, 이 사연이면 PD님 눈에서 눈물이 좔좔 흐를 거야.'

'출연료 50만원은 따놓은 당상이지.'

소녀는 자신만만하게 면접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면접실에서 나오는 젊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어?

같은 고향 출신 아닌가?

남자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 너도 왔어? 나 방금 그 이야기 했는데 작가님이 완전 감동하시더라!"

"……그 이야기?"

"응, 우리 고향에서 있었던 그 일 있잖아. 탈북할 때 그 처절했던…"

소녀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 사연을 저 자식이 먼저 써버렸다.


면접실에 들어간 소녀는 급하게 플랜 B를 가동했다.

'괜찮아, 아직 카드가 남아있어.'

'상류층 코스프레다!'

소녀는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으며 말했다.

"저희 집안은 북한에서 꽤 유명한 집안이었어요."

"아버지는 고위 간부셨고, 저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랑 바이올린을 배웠죠."

"평양에서도 손꼽히는 상류층이었답니다. 호호호."

방송작가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그래서요?"

"네?"

"상류층 출신이 왜 탈북했는데요? 거기서 잘 살면 되지."

"그, 그게…"

"요즘 시청자들 눈이 높아요. 상류층 사연은 공감을 못 얻어서 시청률이 안 나와요."

플랜 B, 처참하게 실패.


방송작가가 서류를 뒤적이며 물었다.

"최종학력이 어떻게 되세요?"

소녀는 순간 고민했다.

'금성학원이라고 할까?'

'아니면 김책공대?'

'김일성대학이 더 있어 보이려나?'

고민 끝에 소녀는 결단을 내렸다.

"세 학교 다 나왔어요."

"……네?"

"금성학원 졸업하고, 김책공대 나오고, 김일성대학까지 졸업했습니다."

방송작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저 놀리세요?"

"네?"

"북한 교육 시스템상 그게 가능할 수가 없잖아요!"

작가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금성학원이 뭔지나 알아요? 거기 2년제 기술학교예요!"

"그리고 당신 나이가 몇 살인데 그 세 학교를 다 나와요?!"

"주민등록증엔 19세라면서요?!"

"19살이 어떻게 대학원까지 졸업해요?!"

소녀는 조용히 생각했다.

'아씨. 다음에는 금성학원 1년 다니다가 학비 없어서 중퇴했다고 해야겠다.'

물론 금성학원은 학비가 없다.

북한은 무상교육이니까.

그러니까 이것도 거짓말이다.


결국 소녀는 면접에서 탈락했다.

힘없이 채널A 본사를 나오는 작고 가여운 소녀.

……라고 쓰고 사기꾼이라고 읽는다.

소녀가 정문을 나서는데,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어…?'

'저건…?'

흰 머리카락. 굽은 허리. 느릿느릿한 걸음걸이.

소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할머니…?!'

옛날에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해주던, 3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였다.


"할머니!"

소녀는 두 팔을 벌리고 달려갔다.

"할머니, 보고 싶었어요!"

할머니도 두 팔을 벌리고 다가왔다.

'아, 할머니가 저승에서 나를 데리러 오신 거야.'

'이제 따뜻한 곳으로 갈 수 있어.'

'성냥팔이 소녀처럼 할머니 품에서 행복하게…'

퍽!

"꺄악?!"

할머니가 소녀의 뺨을 후려쳤다.


"이 년아!"

할머니의 욕설이 상암동 하늘에 울려 퍼졌다.

"내가 죽었다고 박 회장님한테 장례비 타먹은 다음!"

"그 돈으로 성형수술해서!"

"이제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네년도 헷갈리지?!"

소녀는 뺨을 부여잡고 멍하니 할머니를 바라봤다.

"하, 할머니…? 살아계셨어요…?"

"당연히 살아있지 이년아!"

"네년 때문에 밤길에서 아는 사람 만나면!"

"다들 귀신인 줄 알고 깜짝깜짝 놀란다고!"

"지난번엔 옆집 아줌마가 나 보고 기절했어!"


할머니의 분노는 끝이 없었다.

"너 엄마한테도 똑같이 했지?!"

"박 회장님한테 엄마가 큰 병 걸렸다고 돈 타먹고!"

"또 엄마 돌아가셨다고 장례비 타먹고!"

"네 엄마가 창피해서 탈북민 단체 모임에 못 나가고 있어 이년아!"

소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건…"

"그리고 네 아빠!"

"성실하게 직장생활하는 네 아빠를!"

"왜 알코올중독자라고 방송에서 말하고 다녀?!"

"네 아빠 친구들이 아빠가 폐인 된 줄 알고 술자리에 안 불러준다고!"

"네 아빠가 회사에서 뭐라고 소문났는지 알아?!"

"'걔 딸이 방송에서 알코올중독이라고 했대' 이러고 다닌다고!"


할머니가 소녀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네년은 탈북민의 수치야 이년아!"

"당장 집에 가자! 오늘 뒈지게 맞아야 정신 차리겠어!"

"으악! 할머니! 머리카락! 머리카락이!"

소녀는 질질 끌려가며 비명을 질렀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수군거렸다.

"저거 뭐야?"

"할머니가 손녀 끌고 가네."

"요즘 세상에 저런 일이…"

"근데 할머니 욕 진짜 잘하신다."


참고로 할머니는 '욕쟁이 할머니 식당'을 운영하고 계셨다.

손님들에게 욕을 퍼부으며 음식을 주는 그 유명한 컨셉 식당.

욕 실력은 이미 전국구였다.


그렇게 소녀는 할머니에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갔다.

집에서 할머니에게 뒈지게 맞았다.

엄마에게도 맞았다.

아빠는 "난 알코올중독 아니야…"라고 슬프게 중얼거렸다.

남편은 "나 이혼할래"라고 했다.


그 후로 소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음 해, 소녀는 다시 채널A 앞에 서 있었다.

이번엔 진짜 사연을 준비했다.

"할머니가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계셔서 맞은 이야기"

방송작가가 물었다.

"이거 실화예요?"

"네, 진짜예요."

"……이런 사연은 처음이네요."

그렇게 소녀는 드디어 방송에 출연할 수 있었다.

시청률은 역대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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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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