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mazing Digital Circus Theme Song · Carameii
사실상 최초의 장편 다큐멘터리로 영화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북극의 나누크라는 영화이고 앙드레 바쟁도 중요하게 평가했으나 실제 현장에서 찍은 필름 대부분이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 복귀 후 배우 데리고 세트장에서 찍은 게 많은 걸로 압니다.
참고로 저 다큐멘터리도 인종 차별이 잔뜩 들어간 다큐임.
원래는 그 어느 사람들 보다 총을 빨리 받아 들이고, 잘 사용한게 에스키모인들 이었는데, 에스키모인들이 북방계 아시아인 이라는 이유로 미개해야 한다고 해서 다 압류하다 시피 하고, 창과 칼 한자루 던져주고 찍은 다큐임.
여기에 미개하게 만들려는 연출도 많았고.
저 칼 핥는 모습이 그 중 하나임.
파상풍 위험에, 추위에 혀가 늘러 붙을 위험이 있는데 저럴까.
저 주인공는 실제로는 지역간 무역으로 먹고 살던 상인임.
그리고 저거 찍고는 결핵 등으로 2년뒤 사망 하는데 저 다큐 감독은 정당한 대가를 단 한번도 지불하지 않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달아주신 댓글의 내용은 상당 부분 역사적 사실(진실)에 부합합니다.
이 영상은 1922년에 제작된 세계 최초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인 <북극의 나누크(Nanook of the North)>입니다. 감독인 로버트 플래허티(Robert Flaherty)가 제작했으며, 다큐멘터리 역사에서 엄청난 고전으로 꼽히지만, 동시에 ‘조작과 인종차별적 연출’로 점철된 가장 논쟁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댓글의 각 구절이 얼마나 진실인지 조목조목 짚어드리겠습니다.
### 1. 원래는 총을 잘 썼는데 미개하게 보이려고 창과 칼을 줬다?
> 진실 (가장 핵심적인 왜곡)
> 당시(1920년대) 이누이트(에스키모)인들은 이미 서구 문명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고, 사냥할 때 당연히 총(소총)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옷도 서구식 방한복을 섞어 입었습니다.
> 하지만 감독은 백인 관객들이 기대하는 '문명과 단절된 원시적인 미개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총을 못 쓰게 압수하다시피 제한하고, 옛 선조들이 쓰던 창, 활, 하푼(고래잡이 창)을 쥐여주며 사냥하도록 시켰습니다. 털옷도 일부러 입혔습니다.
>
### 2. 칼 날을 핥는 모습이 연출이다? 파상풍과 혀가 붙을 위험이 있다?
> 진실 (위험하고 작위적인 연출)
> 실제 영상에 나오는 유명한 장면 중 하나입니다. 이누이트들은 얼어붙은 칼날에 혀가 대이기만 해도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감염(파상풍 등) 위험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북극의 생존 전문가들입니다.
> 당시 감독은 이누이트가 축음기를 처음 보고 신기해서 레코드판을 이빨로 깨물어 보는 장면 등 '문명을 처음 본 바보 같은 원주민' 프레임을 씌우기 위한 억지 연출을 끊임없이 시켰는데, 칼을 핥는 행위 역시 문명인의 시선에서 '야만성'과 '신기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지시된 연출이 맞습니다.
>
### 3. 주인공은 원래 상인이었다? 이름도 가짜다?
> 진실
>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은 '나누크'이며 가난하고 순박한 사냥꾼으로 묘사되지만, 그의 본명은 '알라카리알락(Allakariallak)'이었습니다. 그는 지역에서 아주 영리하고 인망이 높은 교역 상인이자 굉장히 뛰어난 사냥꾼이었습니다. 영화에 나온 아내와 자식들도 실제 가족이 아니라 감독이 임의로 캐스팅해서 부부인 척 연기하게 한 일종의 '배우들'이었습니다.
>
### 4. 촬영 후 2년 뒤 결핵으로 사망했는데 대가를 주지 않았다?
> 절반의 진실 (결핵 사망은 사실, 굶어 죽었다는 건 감독의 거짓말)
> 알라카리알락은 영화가 개봉하고 약 2년 뒤인 1924년에 사망한 것이 맞습니다.
> 당시 감독인 플래허티는 영화의 극적인 비극성을 높이기 위해 "나누크가 영화 촬영 후 얼마 안 가 북극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사냥하다가 굶어 죽었다"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습니다. 하지만 훗날 밝혀진 진실은 굶어 죽은 게 아니라, 백인들이 옮긴 결핵(Tuberculosis)에 걸려 집에서 사망한 것이었습니다.
> 정당한 대가 지불 여부에 대해서는 완벽한 기록이 없지만, 당시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막대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어 감독은 거부가 된 반면, 주인공과 이누이트 부족들은 여전히 비참하고 가난한 삶을 이어가다 병사했기 때문에 '착취당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합니다.
>
### 요약하자면
이 다큐멘터리는 백인 우월주의 시선에서 "아시아계 인종인 이누이트는 문명을 모르는 미개하고 순진한 원시인이다"라는 프레임을 짜놓고, 실제 총과 문명을 쓰던 현대인을 데려다가 억지로 원시인 연기를 시킨 '페이크 다큐'가 맞습니다.
따라서 질문자님이 보신 댓글은 당시 다큐멘터리 제작 이면의 추악한 진실을 아주 정확하게 짚어낸 글입니다.
《북극의 나누크》(Nanook Of The North)는 1922년 미국에서 제작된 로버트 J. 플래허티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알라카리알락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로버트 플라어티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이 다큐멘터리는 캐나다 북부 퀘벡의 웅가바 반도를 여행하고, 음식을 찾고, 무역을 하는 이누크, 나누크와 그의 가족의 삶을 따라간다. 나누크, 그의 아내 닐라 및 그들의 가족은 다른 종족이 살아남을 수없는 혹독함을 견디는 두려움없는 영웅으로 소개된다. 관객은 나누크가 종종 가족과 함께 해마를 사냥하고, 이글루를 짓고, 하루를 보내고, 다른 작업을 수행하는 것을 본다.
출처 : 위키백과
에스키모(영어: Eskimo 또는 Eskimos)는 시베리아 극동부, 알래스카, 캐나다 북부, 그린란드에 걸친 북극 지역의 원주 민족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크게 알래스카 북부, 캐나다, 그린란드에 걸쳐 사는 이누이트계 민족과 시베리아 극동부와 알래스카 서부에 걸쳐 사는 유픽족으로 나눌 수 있는데, 두 민족과 가까운 알류샨 열도의 알류트족도 자주 에스키모에 포함된다. 특히 "이누이트"라는 말은 종종 에스키모와 동의어로 쓰이며, 실제로 이누이트족이 에스키모의 대다수를 이룬다.
동쪽 지방의 에스키모인 이누이트는 이눅티투트 제어를, 서쪽 지방의 유픽족은 유픽어를 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같은 조상을 가지는 에스키모-알류트계 언어이며, 또 북극 지방 일대에는 방언 연속체가 형성되어 있다. 문화적으로 이누이트들은 이종, 고종 사촌과 같이 사는 데에 비해 유픽족은 아버지 쪽 위주의 가정을 가진다.
‘에스키모’라는 낱말은 아마도 프랑스어 ‘Esquimaux’에서 왔을 것으로 여겨진다. 많은 사람은 이 낱말이 크리어로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은 크리 지방 사람들이 날고기를 먹는 에스키모족을 보고 이를 경멸하여 붙인 이름으로 알고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민간 어원설 때문에 많은 이누이트가 '에스키모'라고 불리는 것을 모욕으로 여긴다. 하지만 문헌학자들은 이러한 어원설이 거짓임을 밝혔다.
몇몇 알곤킨어족 언어가 이누이트를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란 뜻이거나 그 뜻을 가진 말과 비슷한 발음으로 부른다. 평원 오지브와(Plains Ojibwe)어로 에스키모를 Ashkimo라 부르는데, ashkin은 ‘날 것’, amo는 ‘먹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프랑스어 문헌에서 ‘에스키모’라는 낱말이 등장했을 무렵에 평원 오지브와족과 유럽인의 접촉이 없었고, 오지브와족이 이누이트와 많이 접촉하기 시작한 것조차 식민지 시대 이후이다. 결국 오지브와족이 프랑스어 ‘Esquimaux’를 차용어로 쓰게 되었다는 가능성밖에 없지만, 오지브와족이 듣기에 프랑스어 ‘Esquimaux’는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낱말과 소리가 전혀 다르다. 게다가 크리족들도 전통적으로 날고기를 먹어 왔기 때문에 이누이트를 경멸하여 이름을 붙였다는 설은 믿기 어렵다.
‘Esquimaux’라는 말이 처음 쓰일 당시 프랑스 상인들에게 알려진 언어인, 크리어의 방언 몬타녜(Montagnais)어의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어휘 중에서 에스키모와 소리가 유사한 것은 없다. 에스키모의 어원과 관련하여 몇 년간 여러 설이 논의되어 왔는데, 그 중에는 Montagnais어로 눈신발(snowshoes)의 끈을 묶는 방법을 나타내었다는 설과 ‘외국어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Montagnais어로 미크맥(Mi'kmaq)족을 부르는 말이 ‘에스키모’와 소리가 아주 유사하다는 점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그것이 이 낱말의 어원일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지었다.
오늘날 알래스카주에서는 ‘에스키모’라는 말을 극지방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부르는 말로 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알래스카에서 사는 유픽족은 ‘유픽’으로 불리고 ‘에스키모’라고 불리는 것을 거부하진 않지만, ‘이누이트’라고 불리는 것은 차별로 받아들인다.
유전적 증거를 통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은 북동아시아에서 유입된 인구임이 확인된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대부분은 고인디언(Paleo-Indians)으로 불리는 단일한 초기 이주로 추적될 수 있지만, 나-데네족과 에스키모는 나중에 아메리카로 이주한 별개 인구의 혼합을 나타내며, 이 인구는 극동 북부의 축치족 등과는 가깝고 아메리카 원주민과는 멀다. 현대 에스키모알류트어족 화자 집단은 이 후기 조상의 혈통이 게놈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에스키모보다 더 먼저 이 지역에 살고 있던 고에스키모는 현대 북극 인구와는 구별되나 결국은 마찬가지로 극동 북부의 인구 집단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 고대인들의 일부 또는 전부는 신석기 시대 이전(약 5,000 ~ 10,000년 전) 시대에 축치해를 건너 북미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알류트족의 조상은 10,000년 전 알류트 열도에 거주했다고 믿어진다.
명확히 확인된 고에스키모 문화 중 가장 이른 것은 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에스키모 민족은 북극 소도구 전통(Arctic Small Tool tradition) 문화와 연관된 집단으로서 알래스카에서 발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조상은 아마 3,000~5,000년 전 알래스카로 이주했을 것이다.
알래스카의 유픽 언어와 문화는 알래스카에서 발전한 원주민의 선도싯 문화(Pre-Dorset)를 시작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적어도 4,000년 전
알류트족의 우낭간 문화가 뚜렷해졌다.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에스키모 문화로 간주되지 않으나 오늘날의 이누이트족과 알류트족의 조상인 도싯족이 알류트 제도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있다.
약 1,500~2,000년 전 알래스카 북서부에서 2가지 변이가 명확히 발전했다. 이누이트어 화자 집단이 또렷해지고 수 세기에 걸쳐 알래스카 북부, 캐나다, 그린란드까지 이주했으며, 툴레인(비르니크 문화에서 강한 영향을 받음)의 문화가 에스키모인 거주지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는데 전부가 동화된 것은 아니었다.
출처 : 위키백과
북극 고대 에스키모, 사회 교류 활발
개 썰매로 수백 km 중간 교역지 왕래
by사이언스타임즈
북극 지방에서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거나 순록을 치며 사는 에스키모(혹은 이누이트)들은 외부와의 큰 사회적 교류 없이 동떨어져 살아왔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최근 러시아 북극지방의 발굴 조사 결과에 따르면, 북극 고대인들은 개썰매를 이용해 수백㎞에 이르는 먼 거리를 오가며 교역에 참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알래스카 노아턱 지방의 이누이트 가족 ⓒ Wikipedia
러시아 과학자들은 북극 고위도 지방에 위치한 조호바(Zhokhov) 지역을 발굴 연구해, 비교적 상세한 북극 고대인들의 삶을 고고학 학술지 ‘고대’(Antiquity) 2월 호에 발표했다.
북극 고대인들은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민들을 만나 의사소통을 하고, 일종의 현물시장(fairs) 같은 것을 열어 다양한 물건을 교환한 것으로 파악됐다.
북극은 지구상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사람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러시아나 미국, 노르웨이 등 일부 국가의 극지방에는 산업시설이 있으나 극지방 전체에는 거의 사람이 살지 않아 인구밀도가 매우 희박하다.
기본적으로 인구밀도가 ㎢당 0.03~0.04명을 넘지 않고, 산업지대에는 ㎢당 0.35명으로 증가한 정도다.

조호바 지역에서 흑요석이 나는 크라스노예 호수 부근까지 2000Km 거리 중간에 있는 콜리마 강 유역 중간교역지 지도 ⓒ 김병희 / 구글 어스
조호바 섬, 북극지방 최초의 거주지
조호바 섬은 지금의 동시베리아 해 북쪽 440㎞에 위치한 뉴 시베리안제도의 북위 76도 지점에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조호바 유적지는 고위도 북극지역에서 인간이 거주한 가장 초기의 증거로 간주된다. 이 정착지에는 지금부터 9300~8600년 전 25~50명이 거주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먼 옛날 조호바 섬은 마지막 빙하기가 정점에 달했을 때 해수면이 급격하게 낮아지면서 형성된 광활한 평원의 일부였다. 그 뒤 빙하기가 지나 얼음이 녹자 평원에 물이 들어차고, 침식작용이 이루어졌다.
현재 조호바 유적지는 지금의 조호바 섬 남서쪽, 강한 남서풍이 휘몰아치는 높이 120m 언덕 기슭 가까이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고대인에게 매우 편리한 곳이었다. 언덕은 관측소 역할을 했고, 해안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오는 목재를 공급받았다.

동시베리아 북극해 조호바 섬 유적지에서 발견된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들 ⓒ Vladimir V. Pitulko et al
2000㎞ 떨어진 지역에서 가져온 석기 재료
연구팀은 영구 동토층에서 발굴을 실시해 유적지의 상당 부분인 571㎡에 이르는 면적을 조사했다. 발굴 조사 과정에서 돌과 뼈, 뿔, 큰 동물의 엄니 그리고 나무로 만들어진 많은 도구들이 발견됐다. 이 도구들은 사냥할 때의 무기나 썰매의 부속품 그리고 다양한 일상생활용 도구들이었다.
석기 유물 중에는 미세하게 각을 세운 돌날들이 많았다. 이 돌날들은 측면에 날을 세워 창이나 화살(dart)촉, 혹은 칼로 쓸 수 있는 복합 도구 역할을 했다.
이들 석기 대부분은 그 지역에서 나는 석영 같은 규산질 암으로 만들어졌으나, 일부는 흑요석이나 화산 유리 같은 그 지역에서 나지 않는 이색적인 재료로 제작됐다. 연구팀은 이런 유물을 79점이나 찾았다.
고대인들은 이 이색적인 재료가 여러 돌들 중에서도 가장 잘 쪼개진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매우 얇고 날카로운 날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시베리아 에스키모 모습. 왼쪽은 얇은 판 갑옷을 입은 시베리아 원주민 에스키모. ⓒ Wikimedia Commons
이 재료는 연구팀 또한 매우 중요하게 평가했다. 흑요석이 나온 각 광상은 자체의 고유한 지화학적 특징이 있어 재료의 출처를 찾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호바 섬 근처에는 흑요석이 나올 만한 곳이 없었다. 가장 가까운 곳은 먼 동남쪽 추코트카(Chukotka)의 아나디리(Anadyr) 강 상류에 있는 크라스노예 호수 근처에 있었다. 이곳은 조호바에서 직선거리로 1500㎞, 실제 여행거리는 2000㎞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고대인들이 물리적으로 그렇게 멀리 여행하기가 어려운 거리다.
개 썰매로 중간단계 거쳐 원거리 교역
연구팀은 발굴된 흑요석을 X선 형광분석법으로 조사했다. 이 방법은 비파괴 조사로 표본의 지화학적 속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구팀은 흑요석의 이런 고유한 특징을 활용해 산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논문 저자 중 한 사람으로 RSF 프로젝트의 책임연구자이자 러시아과학재단 재료문화사연구소 구석기부 선임연구원인 역사학자 블라디미르 피툴코(Vladimir Pitulko) 박사는 “특별한 흑요석 종류가 크라스노예 호수 지역으로부터 조호바 섬으로 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라며, “이것은 초장거리 여행으로 9000년 전에 고대인들이 그런 먼 거리를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라고 밝혔다.
피툴코 박사는 “아마도 중간지역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 흑요석으로 만든 제품을 교환하거나 원시적인 교역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북극 고대인들은 개썰매를 이용해 원거리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 사진은 동그린란드 썰매개. ⓒ Wikimedia Commons
연구팀은 또 5만 4000개 이상의 사냥한 동물 잔해를 분석하고 조호바 유적지 거주민들의 연간 경제 사이클을 재구축했다.
이 지역 거주자들은 순록 사냥을 하는 전통적인 육지 사냥꾼들이었다. 겨울에는 굴에서 잠자고 있는 북극곰들을 사냥했다. 이 지역에는 북극곰의 밀도가 꽤 높았기 때문에 식량 공급은 믿을 만하고 안정적이었다.
북극 고대인의 사회 간 접촉, 생각보다 발달돼
이전에 과학자들은 중간 크기의 동물 뼈를 조사했었다. 그 결과 조호바 유적지 인들과 함께 살았던 잘 길들여진 개들이 존재했었음이 밝혀졌다. 이 개들은 크기와 몸무게가 현대의 썰매개 품종과 비슷했다.
경주용 형태의 썰매에서 발견한 부품들은 이 지역 거주자들이 잘 발달된 운송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운송 시스템 덕분에 조호바 사람들은 당시 시베리아 본토의 인근 지역들을 여행하며 그곳 거주민들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조호바 유적지에서 발견된 개 썰매개 두개골. 현대의 썰매개와 거의 같은 모습인 것으로 확인됐다. ⓒ Vladimir V. Pitulko et al
피툴코 박사는 또 콜리마 강과 인디기르카 강 유역이 이런 교역의 중간지점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경우 교환 지점 간 거리는 약 700㎞로, 이른 봄 개 썰매를 이용해 충분히 여행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만남(meeting)’은 나중에 동부 시베리아 북부 주민들이 18~19세기에 조직화되면서 상품 교환 장소만이 아닌 전시 판매장으로 바뀌었다.
정보의 교환은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아마도 그런 만남의 중요한 결과는 생물학적 안정성 유지에 필요한 결혼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피툴코 박사는 “이번 연구 결과는 9000년 전 고대 동시베리아의 북극 거주 고대인들 사이에 높은 수준의 사회문화적 관계가 있었고, 원거리에 있던 조호바 지역 사람들도 여기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라고 말하고, “지구 가장자리에 살았던 고대인들은 고립돼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것보다 이들 사회 간 접촉은 훨씬 발달돼 있었다”라고 강조했다.
[출처 : 오유-유머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