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시대의 토기·청동기·암벽 등 유적·유물에는 해독되지 않는 신석기 기호문자인 ‘신지문자’들이 남아 있다. 이것이 한문자(漢文字)나 훈민정음에도 영향을 미쳤을지는 학계의 연구과제이다. 사진은 요서지역 소하연문화(BC 3000∼BC 2000) 토기 그림문자의 탁본.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14) 고조선의 ‘神誌문자’
- 한민족 문명학
토기·청동기·암벽 등서 유사한 문자 발견… 삼국유사·용비어천가 등 고문헌에도 실재 흔적
세종실록엔 ‘훈민정음이 옛 전자 모방했다’고 기록… 남은 자료 적고 해독 어려워 연구 필요

고조선문명에서는 지배층 지식인만이 사용하던 고조선 말을 표기하는 ‘신지(神誌)문자’라는 글자가 있었다. 그러나 유물이 적게 발견되어 아직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고조선 황화 유역에서 이주민 밝족이 商(상=殷·은)을 건국한 후 고중국어를 표기하는 ‘한문자(漢文字)’를 발명하여 오늘날의 한문이 되었다. 고조선문명의 후예들은 민족별로 여러 가지 문자를 차용한 간이문자를 만들어 사용했다. 15세기 전반기에 들어와서 드디어 조선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새로운 알파벳이 발명되어 모든 우랄·알타이어족 언어와 세계 모든 언어를 쉽고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는 세계 문자가 창조되었다. 고조선문명의 시작부터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고(古)한반도 초기 신석기인은 최초에는 노끈이나 ‘새끼에 매듭’(結繩·결승)을 만들어 의사소통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태호(太호)족이 고한반도에서 중국 산동반도로 건너가서 원주민에게 ‘새끼 매듭’(결승)에 의한 의사소통 방법을 전수해 주었다는 기록은 태호족이 떠나기 전 고한반도에서는 ‘새끼 매듭’에 의한 의사소통 방법이 실행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또한 고한반도 신석기인은 ‘나무에 새김’(算木, 佃木)을 만들어 의사소통했다는 기록(續博物志(속박물지))도 있다. 이러한 새끼줄이나 나무는 모두 썩어버렸으므로 오늘날 그 기호나 부호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바위 또는 토기에 새긴 ‘그림문자’ ‘기호’ ‘부호’는 현재도 남아 있다.
위의 그림문자가 새겨진 요서지역 소하연문화의 토기. 그러나 현 단계에서는 무엇을 기록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관련 학계의 연구과제라고 할 것이다. 고조선에는 신지(神誌)문자라는 문자가 창제되어 실재했다. 고중국에서는 고조선의 신지문자를 ‘창힐(蒼힐)문자’라고 호칭하기도 했다. 한국에는 고조선시대에 신지(神誌)가 창제한 문자가 사용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문헌에 ‘신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라는 서책이 암자에 남아 있었음을 기록했다. 세종 때 편찬된 ‘용비어천가’에서는 ‘구변지국(九變之局)’의 ‘局’을 주석하면서 ‘구변도국(九變圖局)’을 신지(神誌)가 편찬한 도참서(예언 서적)의 이름으로 설명했다.
‘세조실록’에서는 신지비사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라고 기록하면서, 민간이 소장하고 있는 ‘고조선비사’ 등을 관에서 회수하여 다른 원하는 서적으로 교환해주도록 유시했다. ‘예종실록’(1472년 편찬)과 ‘성종실록’(1495년 편찬)에도 유사한 유시가 발령되고 있는 것은 신지의 ‘고조선비사’가 당시까지는 민간에 꽤 널리 보관되어 있었는데 조정에서 모두 몰수하여 소멸시킨 것을 알려주고 있다.
조선왕조 선조 시기의 권문해(權文海)가 편찬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서는 “神誌는 단군시대 사람으로 호는 스스로 선인(仙人)이라 했다”고 기록했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선조 23년) 윤두수(尹斗壽)가 편찬 간행한 ‘평양지(平壤誌)’에는 “평양 법수교(法首橋)에 옛 비석이 있는데 언문도 아니고 범(梵)문자도 아니며 전(篆) 자도 아닌 글자로서 사람들이 능히 알 수가 없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계미년(선조 16년) 2월 법수교에 매장되었던 멱석비(石碑)를 파내어 본 즉 3단으로 나누어졌는데, 비문은 예(隷) 자도 아니고 범서(梵書) 모양과 같았으며, 어떤 이는 이것을 단군(檀君) 시기 신지(神誌)의 소서(所書)라고 말하였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유실된 것이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와 ‘영변지(寧邊誌)’에는 신지문자 16자가 채록되어 있다.
이 밖에 고조선 시대의 토기·청동기·암벽 등 유적·유물에는 위의 문자와 유사한 문자들이 간혹 조각되어 있어서 고조선의 신지문자가 실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고중국에서는 신지(神誌)문자를 창힐문자(蒼힐文字)라고 부르면서 기록을 남겼다.
창힐문자의 비석 탁본(사진 왼쪽). 해독되지 않는 고조선문명 지역의 신석기 기호문자가 새겨진 경남 남해군 양하리 바위와 경북 영일군 칠포리 바위.
중국 고문헌 ‘포박자(抱朴子)’에는 하(夏)나라를 건국한 황제(黃帝)가 靑丘(청구)에 도착하여 풍산(風山)을 지나다가 자부(紫膚) 선생을 만나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청구’는 조선의 옛 이름이며, 3황은 ‘환인·환웅·단군’으로서, 황제가 고조선의 풍산을 지내가다가 고조선의 ‘자부’라는 학자로부터 고조선의 문자(삼황내문)를 받아왔음을 기록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때 황제가 받아간 ‘삼황내문’이 고중국이 창힐문자라고 호칭했던 신지문자라는 것이다.
중국 송나라시대 서기 992년(송 순화 3년)에 간행된 옛 붓글씨 첩책 ‘순화각첩(淳化閣帖)’에는 한문자로 해독되지 않는 글자로 새겨진 비문 28자를 창힐문자라는 이름을 붙여 수록했다. 또한 청나라시대에 세운 중국 섬서성 백수현 사관향(白水縣 史官鄕)에 있는 ‘창성묘(倉聖廟)’라는 사당에 ‘창힐조적서비(蒼힐鳥迹書碑)’와 서안(西安)시 비림(碑林)에 있는 ‘창힐서비(蒼힐書碑)’는 역시 ‘순화각첩’의 창힐문자 28자를 모사하여 세운 것이었다.
신지문자와 창힐문자가 동일한 이유는 신지문자가 고중국에 전수된 것이 창힐문자이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 근거는 우선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위에서 든 ‘포박자’에 고중국 황제가 조선에 간 적이 있을 때 고조선의 학자 ‘자부’ 선생으로부터 고조선 문자(신지문자)를 받아왔다고 풀이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蒼힐’은 ‘푸른나라 사람 힐’의 뜻으로 그 자체 ‘靑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중국에서는 ‘창힐’을 황제의 사관(史官)이라고 하면서 글자를 반포했다고 하여, ‘힐황(힐皇)’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힐’이 사관 이름이며 ‘蒼’은 ‘靑丘’(조선)를 의미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즉 창힐문자란 ‘고조선 사관 힐’에서 받아온 문자의 뜻이 되는 것이다.
고조선의 신지문자는 BC 108년 고조선 국가가 한(漢) 무제(武帝)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한 4군이 설치된 이후 한문자가 본격적으로 들어옴에 따라 급속히 소멸하기 시작했으나, 고려시대까지는 일부 수공업자 계급 사이에서 잔존했던 흔적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 사학자였던 권덕규(權悳奎)는 단군 고조선 시기부터 고려 시대까지 신지문자를 비롯하여 고유 문자가 존재했으며, 조선왕조에서 1443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이를 토대로 크게 계승·발전시킨 것이라는 주장을 일찍부터 강력하게 주장했다. 고조선 신지문자는 초기 소박한 문자 체계의 상태에서 BC 1세기부터 한문자가 보급되기 시작하고, 고구려·백제·신라의 조정에서 AD 4세기∼AD 6세기경 한문자가 공식 문자로 채택됨에 따라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하여 소멸 단계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시대까지는 민간에서 구속용문자(舊俗用文字)로서 잔존했다가, 조선왕조 세조 때 마지막 잔존한 신지문자 관련 몇 종 서적까지 조정이 강제 수집하여 최종적으로 소멸시킴으로써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지문자는 현재 충분히 수집되어 있지 않고, 또한 해독되지도 않고 있다. 고조선문명 연구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수의 연구자에 의해 신지문자가 풍부하게 수집된 다음에 언젠가는 해독될 날이 있으리라고 예견할 수 있다. 신지문자는 앞으로 학계가 연구해야 할 과제다.

조선왕조 세종은 1443년(세종 25년) 마침내, 다음 표와 같은 훈민정음 28자를 제정하여 1446년에 반포했다. 초성(자음) 17자와 중성(모음) 11자로 구성된 알파벳인데, 조립하면 세계 어떠한 언어도 능히 표현할 수 있는, 세계 문자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과학적 문자이다.
주목할 것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제정한 ‘세종실록’ 기사에 훈민정음이 ‘옛 전자(古篆)’를 모방했다고 기록한 사실이다. 또한 정인지의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에서도 “글자는 옛 전(篆)자를 모방했다”고 기록했다. 주의할 것은 여기서 고전(古篆, 옛 전자)을 반드시 한문자의 ‘옛 전자’로만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 표현은 훈민정음 반대파에게는 한문자의 ‘옛 전자’로 해석되게 했지만, 동시에 신지문자의 ‘옛 전자’의 의미도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훈민정음의 글자 꼴이 한문자의 옛 전자와 동일한 것은 몇 개 없는 반면에, 그 정도의 닮은 수는 아직 50여 자밖에 수집하지 못한 신지문자에도 실재하기 때문이다.(표 참조)
물론 훈민정음은 완벽한 표음문자이고, 신지문자는 표의문자인지 표음문자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미지의 문자이기 때문에, 훈민정음이 신지문자를 계승 완성한 문자라고는 추정할 수 없다. 필자는 신지문자와 ‘훈민정음’은 별도의 문자체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는 역사·사회학도이고 언어·문자학자가 아니므로, 이것은 필자의 생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 도중에 모든 기존 문자를 참조했고, 요동에 와 있는 명의 언어학자 황찬(黃瓚)에게 성삼문(成三問) 등을 13차례나 파견하면서 서면 토론한 것을 고려할 때, 세종이 고려시대까지 민간의 일부에서 존속했고 세종의 후대 왕들 시대까지도 존속하여 그 수거를 명령했던 신지비사와 신지문자를 참작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신지문자와 훈민정음의 관계 역시 학계의 앞으로의 연구과제 중 하나라고 할 것이다. 명백히 할 것은 고조선문명에서 지배층은 독자적 신지문자를 제정하여 사용했으며, 한문자가 들어와 그것을 대체한 AD 4세기까지는 신지문자가 지배층 사이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신지문자를 계승했든지 또는 별도의 문자체계로 창작했든지 간에, 고조선문명 창조자의 직계 후예가 15세기에 세계의 모든 문자 가운데서 가장 과학적 문자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평민층까지 모든 백성이 세계에서 가장 알기 쉽고 배우기 쉬운 과학적 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 용어설명
신지문자(神誌文字): 고조선문명 지역에서는 해독되지 않는 신석기 기호문자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이를 고조선 지배층이 자신들의 말을 표기했던 ‘신지문자’라고 일부에서는 추정한다. 고중국에서는 ‘창힐(蒼힐)문자’라고 불렀다. 주류 고고학계에서는 고조선의 문자로 인정하지는 않고 있다.
하진리에서 출토된 ‘줄새김 자갈돌’.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16) 10진법 창조·전파
- 한민족 문명학
남한강 유역 하진리서 발견한 줄새김 자갈돌… 고조선 계승해 농경 기념비·별자리 돌판·토기·돌검 제작 활용
조선 ‘천상열차분야지도’ BC 511년 별자리 그린 것… 1년 365일 주기·24절기 정립했고 달력도 만들어

인류사회의 모든 초기 문명은 각각의 셈법 체계를 사용했다. 메소포타미아 수메르문명은 12진법(進法)과 60진법을 만들어 사용했다. 고조선문명은 어떠한 셈법 체계를 형성해 문명을 창조했을까?
문화재청과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은 2014년 6월 16일 남한강 유역인 충북 단양군(수양개) 하진리의 남한강변 구석기 유적 발굴작업 도중에 3개 층으로 구성된 구석기 유적의 최하층(제3문화층)에서 ‘줄새김 자갈돌(눈금돌)’을 비롯해 총 1만5000여 점의 유물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 가운데 ‘줄새김 자갈돌’이 출토된 제3문화층의 연대 측정은 두 기관에서 39,930bp와 39,680bp(CAL)로 측정됐다. 즉 남한강 유역 단양 하진리에서 약 3만9000년 전 옛 한반도 말기 구석기인의 ‘줄새김 자갈돌’이 출토된 것이다.
이 ‘줄새김 자갈돌’에는 21개의 줄이 1개 눈금 평균 4.141±0.326㎜의 간격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계측됐다. 이 유물을 발굴한 고고학팀은 이 ‘줄새김돌’을 말기 구석기인들이 분명히 의도적으로 같은 길이를 계산하고 만든 눈금 선이라고 보고, 이 ‘줄새김 자갈돌’을 구석기 말기∼초기 신석기인들이 어떠한 용도로 사용했고, 자갈돌에 새겨진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갈돌에 대한 연구를 학계에 요청했다.
하진리 ‘줄새김 자갈돌’의 눈금 계측. 필자는 이를 검토 분석해 고조선문명 형성의 첫 기반인 신석기시대 한강문화의 ‘10진법 척도(尺度, 자)’라고 판단했다. 일부에서는 구석기 말기에 어떻게 숫자의 개념이 정립되고 길이 측정의 척도까지 만들 수 있었겠는가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와질랜드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이에 위치한 르봄보(Lebombo)산에서 약 4만4200년 전∼4만3000년 전의 원숭이 종아리뼈에 29개의 줄을 새긴 ‘르봄보 뼈(Lebombo Bone)’가 호주 고고학자 보몽(Peter Beaumont)에 의해 1970년대에 발견됐다. 학계에서 이 눈금돌을 길이의 척도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1937년 체코슬로바키아 모라비아 지방 베스트니츠 마을에서 발견된 약 3만 년 전의 7㎝ 크기 어린 늑대 정강이뼈에 새겨진 55개의 눈금은 5개씩 무리 지어 배열되어 있어서 구석기인들이 약 3만 년 전에 셈법의 개념을 정립했음을 알려주었다. 또한 아프리카 나일강 상수원의 하나인 에드워드 호숫가의 이샹고(Ishango)에서 1960년 벨기에 브뤼셀대 교수인 지질학자 하인젤린(1920∼1998)에 의해 발견된 약 1만9500년 전의 짐승 뼈인 ‘이샹고 뼈(Ishango Bone)’에 그려진 세 개의 행에 새겨진 눈금을 두고 세계 학계가 아프리카의 말기 구석기인의 숫자 개념 형성과 후일 이집트문명의 ‘10진법(decimal system)’ 형성의 기원까지 논하는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옛 한반도 남한강 유역 하진리 ‘줄새김돌’이 ‘길이의 척도’임은 다음의 사실에서 확인된다.
첫째, 하진리 ‘줄새김돌’의 21개 줄의 ‘눈금’ ‘사이 길이’가 평균 0.4141㎝로 균일하다.
둘째, 하진리 ‘줄새김돌’의 자갈돌 전체 길이는 20.6㎝인데, 중앙에 새겨진 눈금칸 20개의 총 길이는 8.2816㎝에 불과하고, 좌우(또는 상하)에 10㎝ 이상의 긴 여백이 남아 있다. 이것은 눈금을 30개 이상 새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20개 눈금칸만을 새긴 것으로서, ‘20개 눈금칸’을 1단위로 한 8.2816㎝의 자 ‘척(尺)’(즉 1尺)을 사용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셋째, 수양개 6지구 하진리 ‘줄새김돌’은 이 지역 구석기인들이 ‘표준척’을 채택해 사용한 증거로 해석할 수 있다.
셈법 언어(수사·數詞)의 구조는 잘 변하지 않는 것인데,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셈법 언어는 당시 용어로는 알 수 없고, 고대·중세 및 현대 한국어에 그것이 남아 있으므로, 이를 통해 추적해 볼 수 있다. 즉 한국어(고대·중세·근대·현대 포함)의 셈법은 정확하게 ‘10진법’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1부터 10까지는 각각 숫자의 독립된 명칭을 갖고 있고, 11부터는 ‘위치’를 한 단계 격상해 옮겨서 1단계의 끝자리의 명칭에 다시 1∼9까지의 명칭을 붙여, 20이 되면 새로 독립된 명칭을 만든 후 또 위치를 한 단계 격상해 옮겨서 1∼9까지의 명칭을 붙이는, 매우 정확하고 기계적인 ‘위치적 10진법(positional decimal system)’ 체계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어의 정확한 ‘위치적 10진법’의 셈법 표시는 백(온, 百)·천(즈믄, 千)·만(만, 萬)을 넘어서 무한대로까지 10진법을 적용하는 과학적, 기계적, 논리적 체계를 갖고 있다.
남한강 유역 말기 구석기인의 10진법은 그 후 1만2000년 전 지구가 온난화되어 구석기인들이 동굴에서 나와 신석기문화를 만들면서 신석기인으로 진화하자, 이 지역 신석기인의 ‘10진법’으로 계승·확산되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한강 유역과 금강 상류에서 동아시아 최초의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이 시작되어 옛 한반도 전체와 북위 40도선 이북의 새 개척지에도 전파되었으므로, 남한강 유역의 ‘10진법’은 옛 한반도 신석기인 문화유형의 이동과 확산에 동반해 전체 동아시아에 전파되었을 것임을 논의하는 것도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 옛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10진법’이 ‘고조선문명의 10진법’으로 발전될 수 있음은 당연한 문화 전승 귀결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조선문명의 첫 기반인 신석기시대 한강문화에서 수양개 ‘눈금돌’ 척도를 계승한 10진법의 ‘척도’를 계속 사용했다는 증거는 한강문화 고고유물에서 증거를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충북 옥천군 남곡리에는 신석기시대 농업경작의 업적을 기린 기념선돌이 남아 있다. 남곡리 1호 선돌(남곡리 개미재 선돌)은 기념하는 업적 내용을 선돌 표면에 논밭 고랑 45개를 등간격의 줄로 새기어 표시했다. 위의 직삼각형 부분을 제외하면 고랑줄의 길이는 약 41㎝이고, 줄의 간격은 3∼4㎝이며, 줄의 깊이는 최대 1㎝로서 모두 끌(돌끌)로 쪼아서 새긴 것이었다. 농경생활 건축물 제작에 사용한 것이다.
또 충북 청주시 청원의 아득이 고인돌 유적 가운데, 사암을 손질해 편평한 네모꼴(32.4×25×5㎝)로 돌판을 만들고 그 위에 크고 작은 금을 파서 북두칠성·용자리·곰자리 등의 별자리를 새긴 돌판이 발굴됐다. 한강문화 지역에서는 중요한 토기(예: 의례용 토기, 붉은 간토기 등)의 제작에서는 하진리 ‘눈금돌 척도’와 같은 길이의 척도를 사용한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고조선문명의 첫 기반인 신석기시대 한강문화에서는 돌검 등 무기의 제작에서도 남한강 유역 수양개 하진리 출토 ‘눈금돌 척도’와 동일한 ‘길이 척도’가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신석기시대 ‘한’족의 한강문화·대동강문화와 ‘맥’족의 홍산문화, ‘예’족의 신석기문화가 BC 30세기∼BC 24세기 고조선 국가의 건국을 계기로 합류하고 통합되어 인류 최초 5대 독립문명의 하나인 ‘고조선문명’을 창조하는 단계에 들어서자, 고조선문명은 당연히 한강문화의 ‘10진법’을 계승, 채용해 한 단계 더 높은 문명을 창조했다.
자(尺)를 들고 있는 고조선 이주민 족장 복희의 상징 초상.
또한 고조선문명의 ‘10진법’은 옛 한반도에서 건국된 고조선 국가의 영역이 만주의 요동·요서 지역으로 확대되고, 그 이후 더욱 영역이 확대되는 데 비례해 고조선문명권(圈)의 보편적 셈법으로 전파 확산됐다고 해석된다. 고조선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산동반도와 황하 및 회수 사이의 옛 중국 동해안에 이주해 정착하고, 일본 열도의 규슈(九州) 지방 등에 이주해 정착하자, 고조선문명의 ‘10진법’은 이 지역에도 고조선 이주민들과 함께 전파·확산되었음을 추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국 고대학자들이 약 6000∼5800년 전에 동방 진(震·辰)국으로부터 황하 유역으로 이주해 와서 문명을 가르쳐 주었다고 기록한 고조선 이주민 태호(太호)의 족장 부부의 문장으로 태양 아래 족장 머리 위에는 ‘자(尺)’를, 족장 부인의 머리 위에는 ‘가위’를 그렸다. 태호족 족장이 고(古)한반도 고조선 진(辰)국 지역에서 갖고 이주한 상징 그림 머리 위의 ‘자(尺)’가 고한반도 수양개 하진리 출토 10진법 ‘눈금돌 자’의 연속선상에 있음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산동지역에 처음 고조선 이주민들이 세운 고대국가 가운데 박(밝)국은 점차 발전해 상(商)국이 되었고, 상국은 ‘10진법’을 사용했다. 상의 ‘10진법’은 고조선문명의 ‘10진법’이 전파된 것이다. 필자는 고중국 황하문명의 10진법, 12진법, 60진법 혼용 가운데서 10진법은 고한반도 고조선 이주민인 태호족과 상의 건국 세력이 고조선문명에서 가져간 것이라고 본다.
옛 한반도에서는 이미 3만9000년 전에 ‘10진법’의 길이 ‘표준척’이 고안되었으며, 이를 계승한 신석기시대 한강문화와 뒤이은 고조선문명에서는 이집트문명과는 다른 별도 고한반도 기원에서 그 이전에 ‘10진법’이 사용되었음이 증명되는 것이다. 이집트문명의 10진법에는 1만9500년 전의 이샹고 뼈의 10진법 유물이 배경에 관련되어 있다. 고조선문명의 10진법 배경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3만9000년 전의 하진리 ‘눈금돌’ 10진법 척도가 출토되어 있다. 고중국문명의 10진법은 고조선문명의 10진법이 태호족·소호족과 상의 건국 세력을 통해서 전파된 것이다.
현재 세계 학계의 인류문명사 연구는 10진법이 이집트문명에서 형성되어 세계에 전파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이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인류문명의 최저변의 과학적 기초가 된 10진법은 2개의 기원을 갖고 있음이 판명됐다. 그 하나는 동방에서 고한반도에서 탄생한 고조선문명의 10진법이다. 동방의 10진법은 고중국문명을 포함해 모두 고조선문명에서 전파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집트문명의 10진법이다. 서양의 10진법은 이집트문명의 10진법이 전파된 것이다.
인류문명 진보의 3단계 법칙을 일찍이 정립했던 오귀스트 콩트는 인류의 문명 창조 지식이 수학·천문학·물리학·생물학·사회과학의 순서로 체계화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고조선문명에서도 이 체계적 진화가 뚜렷하게 보인다. 고조선문명은 10진법과 햇빛살, 돌 건축물을 기하학적으로 도안·설계하는 놀라운 기하학적 지식, 고인돌 판에 새긴 해·달·별들의 그림, 광물의 여러 가지 합금 기술에서 매우 우수하고 독특한 문명의 시작을 유형화해 나가고 있다.
대한민국 국보 228호로 지정되어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고구려의 석각 탁본을 이성계의 명으로 돌에 새긴 전통시대 세계 최고의 정밀한 성좌도이다. 이 유물은 1467개의 별을 북극성을 중심으로 3개의 원 울타리와 28개의 분야로 구획해 별자리를 정확히 그린 별자리 지도이다. 현대 천문학은 북극성으로부터의 거리와 각도만 있으면 별자리의 연대를 정확히 알아내는 ‘공식’을 정립했다. 자연과학자들이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별자리를 이 공식에 그대로 대입해본 결과, 이 별자리는 BC 511년의 하늘을 그린 것이었다. 즉 고조선 시대 고인돌 뚜껑 등 돌에 새긴 별자리를 고구려가 탁본 뜬 것을 이성계가 다시 비석에 새긴 것이었다. 서양 고대의 별자리 관찰은 점성술로 정립되었는데 고조선의 천문학은 해와 달, 별자리 운행의 규칙성을 장기간 관찰해 1년 365일 주기와 24절기를 정립하고 ‘달력’을 작성해 농업 등 과학적 생활에 응용하는 과학으로 크게 발전했다. 강화도 마니산의 고조선 유적 참성단은 제천과 함께 해·달·별을 관측하는 천문대 유적이었다. 고중국에서 ‘은역(殷曆)’ ‘상역(商曆)’이라고 말하던 달력이 ‘고조선 달력’이었다. 중국 고문헌 ‘삼국지’ 예(濊)전은 “(예족은) 별자리 움직임을 보고 농사의 풍흉을 예견했다”고 기록했다.
자연과학자들이 정밀하게 밝혀내겠지만, 고조선문명은 10진법과 과학·기술에 기초해 성립된 인류 5대 문명의 세 번째 탄생한 최초 독립문명이었다.
■ 용어설명
천상열차분야지도 : 조선 태조 4년(1395) 음력 12월 석판에 새겨 만든 천문도(天文圖).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전천(全天) 천문도 중 하나로 문신 권근, 천문학자 류방택과 서운관 직원 등 모두 12명이 만들었다. 이는 하늘의 모습을 12차(12次·목성의 운행을 기준으로 설정한 적도대의 열두 구역)와 분야(分野·역대 왕조에 대응하는 땅의 영역)로 배열해 놓은 그림이다. 천문도에는 성도(星圖)와 함께 24절기에 따른 혼효중성(昏曉中星·초저녁과 새벽에 남중하는 별), 해와 달, 동양의 우주구조론, 천문도 제작 경위, 제작자에 관한 내용 등이 적혀 있다.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12) 고조선의 사회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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